추리무협소설 <천지> 86회

등록 2006.12.05 08:14수정 2006.12.0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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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의여인이 운중보주를 비롯하여 무림선배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풍철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생사판(生死判) 종문천(鍾門天)을 부르지 않고 막내를 부른 것이 어쩌면 잘못된 판단인지도 몰랐다.

'제기럴… 선화를 데리고 올 줄 알았나…? 아니…, 함곡 저 자식이 올지 알았느냐고…?'


@BRI@풍철한이 속앓이를 하며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형제, 남들이 중원사괴라 부르는 형제 중 막내인 혈녹접(血綠蝶) 소유향(蘇有香)이 처음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내려가서 데리고 와야 할 입장이었지만 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소유항이 내린 뒤에도 여전히 명호를 대면 알만한 인물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번 운중선에 중의어른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풍철한이 던진 말만은 아니었다. 운중보주도 조금 전 '이제 세 명이 된 친구 중 마지막 한 사람을 맞이해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죽어서 들어온 한 친구와 살아서 돌아온 한 친구를 맞이하겠다는 것은 분명 죽은 혈간과 중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헌데 왜 운중보주는 그냥 올라간 것일까?

"아마 오셨을 걸세. 어쩌면 저들 무리 중에 끼어 있을지 모르지."

함곡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풍철한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되물었다. 중의라면 동정오우 중 일인이다. 더구나 보주와 성곤의 친구다. 그 친구가 왔는데 모른 척하고 화산파 일행과 자리를 뜬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동정오우라면 운중선에서 제일 먼저 내리는 것이 불문율.


"중의어른에 대해 듣지 못했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라고는 알고 있네. 과거 구룡이 반드시 죽이고자 했던 인물이 중의였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모습이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다고 하더군. 하지만 지금은 이미…."

아마 뒷말은 이십육 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동정오우의 세상이니 몸을 감출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네. 중의어른은 구룡과의 혈전 후에도 세상에 전혀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지. 사실 중의어른이 화타(華陀)나 편작(編鵲)을 능가하는 의술을 가졌다고 알려졌지만 누가 중의어른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던가?"

"무슨 말을…?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번 말은 나오지 않았는가? 간혹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중의어른의 치료를 받고 완쾌되었다고 하는 말도 떠돌았고…, 자네 설마 이십년 전 무당의 운학진인(雲鶴眞人) 역시 주화입마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가 중의어른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

함곡을 바라보는 풍철한의 시선은 어떻게 그런 것을 모를 수 있느냐고 표정이었다. 이미 전설처럼 무림에 떠도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의원에게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낮지 않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중의에게 치료를 부탁하고자 찾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 소문은 확실히 맞는 것이네. 하지만 자네나 세상 사람들은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말을 하고 또 그것에 과장된 말이 붙어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다네."

소유향은 남들의 시선을 만끽하고 있는 듯 아주 천천히 백팔제를 오르고 있었다. 함곡이 이미 백팔제를 절반이나 올라오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풍철한에게 돌렸다. 풍철한은 물론 설중행까지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함곡을 바라보았다. 소문은 사실이지만 중의에 대한 말은 과장된 소문에 불과하다니…?

"중의어른에게 삼불자(三不子)란 별호가 따라다닌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들 있을 걸세."

중의 공손정은 조금 괴팍한 인물임이 분명한 모양이었다. 삼불자란 별호도 호사가들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아 만든 것에 불과하다지만 중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고 한다. 삼불자는 중의가 지금까지 보여준 세 가지 치료원칙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중의는 첫째,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비싼 약재가 들어가고 치료하는데 시일이 얼마 걸리든 치료비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불치병만을 치료한다는 것. 다른 의원들이 온갖 처방과 침술을 사용해도 고칠 수 없어 포기한 환자들만 치료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치료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의는 친구들인 동정오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치료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이 원칙은 사실 자신에게 치료받은 환자가 재발하거나 다른 죽을병에 걸려도 치료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별호는 사실 과장된 것이지만 아무튼 중의어른이 지금까지 보여 왔던 행동과 무관하지 않네. 그것이 또한 세간의 사람들이 중의어른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이지. 사실 중의어른은 그동안 자신이 중의입네 자신을 밝히고 치료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네. 더구나 변장술이 뛰어나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것도 더욱 중의어른을 신비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봐야지."

"………!"

"무당의 운학진인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네. 나흘 밤낮 동안 치료를 했다고 하는데 운학진인이 마지막 운기행공을 할 때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네. 주화입마의 기운이 사라지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에야 자신을 치료한 사람이 중의가 아닐까 말했을 뿐이네. 그것이 소문에 꼬리를 물어 중의어른이라고 단정 지어진 것이고,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라네."

"그렇다면 그런 소문들은 모두 헛소문이었단 말인가?"

"헛소문만은 아니었을 걸세.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환자들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었으니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 더구나 다른 의원이라면 어쩌다 불치의 병을 치료해도 유명세를 타기 위해 자신이 그랬노라고 애써 소문을 내려는 판에 누군지도 알지 못하게 사라졌으니 자연 중의어른이라고 믿지 않겠나?"

확실히 의원은 신비한 면이 있어야 더욱 유명세를 타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까발려진 일 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한 쪽에 더욱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신비함에 세간의 소문이 부풀려지게 되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게 마련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느새 일행에게 다가든 혈녹접 소유향이 풍철한과 반효(班哮)를 향해 잠시 눈인사를 하고 나서는 함곡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입가에 사내의 마음을 녹일 듯한 미소가 걸려있어 웬만한 사내로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오년 만인가? 소낭자는 갈수록 더 예뻐지는 것 같구려."

말은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함곡의 입술꼬리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함곡선생의 칭찬은 언제나 소녀를 황홀하게 만드는군요."

그녀는 함곡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시선을 돌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선화를 향해 다시 몸을 낮추며 나긋한 인사를 보냈다.

"어머…, 선화언니께서도 와 계셨군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풍철한과 선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풍대가(馮大哥)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라니…."

"내가 왜 소낭자의 언니가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오랜만에 보는군요."

선화 역시 아직까지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마지못해 하는 대답이었고, 그녀의 표정엔 아직까지 냉랭한 표정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허험…!"

풍철한이 머쓱한지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시선을 다시 입구 쪽으로 돌렸다. 이미 서먹해진 분위기에 무슨 말을 해보았자 불똥은 자신에게 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풍철한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헙…, 저 돌팔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단지 이 순간의 어색함을 모면하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풍철한의 얼굴에 의아스러움과 함께 어리둥절한 표정이 급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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