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7회

등록 2006.12.06 08:15수정 2006.12.0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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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냉랭한 기운이 흐르던 분위기가 풍철한의 표정에 일제히 시선을 운중선에서 내리고 있는 인물들에게 향했다.

"왜 그러는가?"


함곡이 묻자 풍철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설중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이제 막 운중선에서 내리는 왜소한 노인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쫓아 노인을 보는 반효의 눈에도 의아스러움이 떠올라 있어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게 만들었다.

"저런 돌팔이가 이곳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는 것이지?"

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성 같은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풍철한은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주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함곡에게 물었다.

@BRI@"저기 회색 옷을 입은 노인네가 누군지 자네는 알 수 있나?"

풍철한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노인네의 행색은 볼품이 없었다. 일견하기에도 깊은 산골을 헤매며 약초나 캐는 노인네의 행색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함곡 역시 그 노인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도 주의를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인물들과 함께 백팔제를 힘겨운 듯 오르는 노인을 보는 함곡의 시선에도 서서히 놀라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군…. 저게 본 모습일까?"

함곡이 중얼거렸다. 마치 전염병처럼 풍철한의 중얼거림이 함곡에게도 옮겨진 것 같았다.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함곡이 잠시 풍철한을 보았다.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어차피 같은 배를 탔으니…. 더구나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어차피 알게 될 터이니…, 말해주는 것도 무방하겠지. 내 기억과 판단력이 흐리지 않았다면 저 노인은 중의어른이 분명할 것 같네."

말하는 함곡의 태도는 유난히 신중했다. 그의 목소리도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고 조심스러웠다.

"뭣…?"

함곡의 말에 놀람이 가득 담긴 경악성은 풍철한과 반효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백팔제를 올라오는 노인으로 향했다. 저 노인이 동정오우 중 한 명인 중의라니…?

"빌어먹을…, 이게 어찌된 일이지?"

어쩐 일인지 풍철한의 놀람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주 낭패한 기색이었다. 반효마저도 풍철한과 같은 곤혹스러움과 당황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어 함곡이나 다른 사람들을 또다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저 노인이 분명 중의어른이란 말인가? 자네 일전에 중의어른을 만나 뵌 적이 있었나?"

풍철한이 다급하게 물었다. 함곡은 풍철한의 갑작스런 변화에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 아무리 보아도 이전에 풍철한이나 그 형제들과 중의와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소유향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풍철한과 반효에게 해당되는 일 같았다.

"단 한 번…! 십여 년 전쯤에 홀로 나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네. 물론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지만 분명 중의어른일걸세. 그런데 도대체 자네는 왜 그러는가?"

풍철한은 다시 설중행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허탈한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전 바보가 된 기분이군. 아니…,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해…."

풍철한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자책을 하는 것도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누구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허탈감이나, 놀림감이 되었을 때의 자책하는 것과 같은 표정도 섞여 있는 듯도 했다. 그는 무엇이 억울한지 어금니를 짓씹으며 또다시 뇌까렸다.

"나를 가지고 놀았겠다…? 이런 빌어먹을…."

그는 다시 중의가 있는 쪽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설중행에게 기분 나쁘다는 듯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임마…! 너도 저 중의 노인네를 알고 있었어?"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풍철한의 눈길에 신경이 쓰이고 있던 차에 드디어 자신에게 물어오자 설중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뵌 적이 한 번도 없소."

"모른단 말이야?"

풍철한이 뭔가 캐낼 것이 있다는 듯 설중행을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마치 신문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저 노인네와 내가 알고 모르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오? 여하튼 나는 저 노인네를 처음 보았고 아는 노인네도 아니오. 헌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요?"

"빌어먹을…, 그럼 대체 어찌된 일이지? 이거 완전히 귀신에 홀린 것 같군. 이 자식아…. 사흘 전 네 놈 상처를 치료해 준 의원이 바로 저 중의노인네란 말이야…."

"그럼 돌팔이라고 했던 의원이 저 노인이었단 말이오?"

혼절해 있는 동안 치료를 했으니 설중행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풍철한이 탓하는 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설중행이 잘못한 일도 없다. 풍철한은 갑자기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멍하고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연이고, 어디서부터 계획된 것일까? 분명 운중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가운데 설중행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막연히 느낌만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분명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저 노인네가 중의라면 하릴없이 우연을 가장해 설중행을 치료했을 리 없었다.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로 치솟고 있었다. 모든 일이 무섭도록 치밀한 각본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각본에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이제는 분명했다. 자신이 이미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듯 누군가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행동을 예측해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스스로 이용당하고 있는지 알지도 모른 체 지금까지 이용당한 것이고, 앞으로도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인가도 별로 많지 않은 곳에서 의원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집저집 물어보다가 우연하게 전날 마을에 들어온 노인네가 약초 캐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조금은 의술을 알지 않겠느냐는 동네 사람 말을 믿고 찾아갔다가 만난 노인네였는데 그가 바로 중의 저 노인네였던 것이다.

게다가 저 교활한 노인네는 자신을 숨기고 마치 돌팔이 의원처럼 구는 바람에 협박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면서 치료하게 했는데, 그런 자신을 보며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아마 그런 상황을 누군가 보았더라면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러가며 웃어댔을 것이다.

그들 중 아무리 무공수위가 가장 낮다 하더라도 동정오우 중 한 명인 중의가 풍철한의 협박에 못 이겨 치료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삼불자란 별호까지 있는 중의가 은자 닷 냥 반 때문에 치료해 주었을 리 만무했다.

분명 설중행 저 자식을 치료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 대놓고 이야기를 할 것이지 치료비랍시고 흥정은 왜 했단 말인가? 그것도 약초나 캐서 살아가는 돌팔이의원처럼 보여 가며 말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군. 이거 정말 내가 미친놈 아니야?"

풍철한의 뇌까리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함곡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느낌은 풍철한과 비슷했다. 이 사건에 중심에 설중행이 있다는 막연한 추측도 했었다. 이제는 풍철한과 같이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설중행과 관련된 일들은 하나하나 우연한 일인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공교로웠다.

'도대체 설중행이란 저 청년은 누굴까? 이 운중보 출신이라면 왜 귀산노인이 건네 준 인명부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지워져 있었을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지워져 있는 기록을 구태여 볼 필요가 없어서 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귀산노인에게 들러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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