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3회

등록 2006.12.14 08:42수정 2006.12.1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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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수를 멈추고는 가볍게 능효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오. 주인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추태를 보였소. 용서해 주시오."


"별 말씀을…. 소생이 오히려 일시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주제넘게 떠들었습니다."

능효봉 역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항상 짓고 있던 장난기 섞인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어려서부터 절도 있는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나 예의를 배운 인물처럼 보인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아니오. 천만의 말씀을…."

@BRI@상만천의 시선이 상교교로 향했다. 능효봉을 바라볼 때는 정중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한순간 상교교에게 돌아갈 때쯤에는 매우 엄격하고 노기가 섞여있는 눈빛으로 변했다.

"너는 본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아비는 어쩔 수 없이 본 가 율법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벌을 내릴 것이다."


"아버지…!"

그 말을 들은 상교교는 갑자기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도대체 가문의 율법이 무엇이길래, 그리고 세 번째 벌이 무엇이기에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상교교가 저리 사색이 되는 것일까?


상교교의 옆에 앉아 있던 상민민 역시 무거운 낯빛이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언니로서는 오늘 아침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분기를 참지 못하고 실수를 한 것뿐이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너무 과한 체벌이 아닐는지요? 오히려 아버님의 실수까지 언니가 떠맡는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공손한 말이었지만 은근히 부친의 잘못까지도 지적하고 있었다. 상만천 자신도 주인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실수를 했으면서 그것까지 오히려 상교교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호오…, 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구나. 그러나 이미 이 아비가 한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 다만 교교… 네가 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능대협에게 잘못을 빌고 능대협이 진심으로 너를 용서하겠다는 대답을 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

그 말에 사색이 되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았던 상교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감사하옵니다. 아버님…."

평소에는 쓰지 않던 존칭을 올려가며 그녀는 애교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급히 능효봉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능대협…!"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빨리 자신의 부친 앞에서 용서한다는 말을 빨리해주라는 태도였다. 허나 능효봉은 상교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먹다 남은 음식을 다시 조금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상만천은 정말 심계가 깊은 인물이로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풍철한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상만천은 상교교의 실수 하나를 기화로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현재 궁지에 몰려있는 상만천으로서는 일단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함곡 일행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거래를 하고자 손을 내민 이상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 꺼리가 생긴 셈이었다. 자신들의 위치를 낮추고 거래를 추진하다가 보면 상대는 방심하게 마련이었다.

상교교로서는 어찌되었든 능효봉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용서를 받아내려 할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관계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또 하나 상만천에게 있어 함곡 일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함곡 일행에 그가 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쪽의 인물이 스며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차차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추의 문제였다. 그에게 있어 용추는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그를 잃게 되면 난관을 헤쳐나갈 중요한 인물을 잃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용추가 정말 흉수로 몰리게 되면 자신은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다. 용추를 잃는 것은 물론 동창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고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가업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상만천으로는 함곡 일행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단 함정에 빠진 용추만을 구해내겠다는 생각만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움직이지 않는 자신이 직접 움직인 이유였지만 보이지 않는 흉수를 상대하기 위하여 함곡 일행은 반드시 필요했다.

"쩝쩝… 저 자식 말에 갑자기 식욕이 되살아나는군. 나도 욕을 처먹어야 정신을 차리는 놈인가 봐."

풍철한이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로 상교교가 애절하고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능효봉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정말로 식욕이 되살아난 듯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씁쓸한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일단 분위기는 반전된 셈이었다.

"아이… 능대협…."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능효봉을 향해 상교교는 필사적으로 아양을 떨며 불렀다. 능효봉이 상교교에게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아직 식사가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소."

좀 전의 예의 바른 태도와는 다른 능글거리는 웃음이었다. 상교교는 속에서 화가 불같이 치밀어 오르고 목구멍까지 욕설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개자식…, 나쁜 자식…!'

그녀는 속으로 그녀가 알고 있는 욕설을 모두 생각해 내 마구 퍼부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비추면 끝장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사내의 간담을 녹일 것 같은 매혹적인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저 자식이 비록 지금은 자신을 조롱하고 있지만 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고, 그 후에는 무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고.

지금 자신이 계속 채근할 때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부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은 분명 저들을 부친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은근하고도 애교스런 눈길을 능효봉에게 던지며 다른 이들과 같이 다시 수저를 들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소."

상만천은 시선을 능효봉과 설중행에게 던지며 불쑥 말을 던졌다.

"..............?"

"두 분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왜 동창의 비영조에 있었을까? 무슨 연유가 있어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려야 하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까?"

차라리 이것은 비수를 등에 꽂는 기습이었다. 천천히 음식을 씹고 있던 능효봉의 우물거림이 멈췄고, 수저로 입에 막 음식을 넣으려던 설중행도 한순간 동작이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마주쳤다가 상만천에게 향했다. 얼마 전 같으면 상만천을 죽여야 할지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시스템 정비로 인하여 어제 올린 92회는 따로 문화란에 실려 있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곧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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