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4회

등록 2006.12.15 10:06수정 2006.12.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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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만천은 알고 있었다. 상만천은 이미 능효봉과 설중행이 동창의 비밀조직인 비영조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비영조에 속해있다는 것은 극비였다. 혈간 시해 사건 이후로 사라져 버린 조직이지만 그들의 명단은 동창의 고위관료 외에는 알지 못하는 사안이었다. 동창의 고위관료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고위관료는 모르는 사안이었다.

헌데 이미 상만천은 알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소문대로 그가 가진 정보는 전 중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일까? 동창 내부의 일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다. 더구나 비영조와 같은 비밀조직의 일은 알려질 수가 없다.


@BRI@"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능효봉은 굶주렸지만 구걸하거나 훔친 적이 없다고 했다. 더더욱 남의 것을 빼앗아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상만천은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겠소."

동시에 그의 시선은 설중행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능효봉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중행은 또 어떤 변명을 댈까 궁금한 표정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가 버림을 받았을 때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설중행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의외로 상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은 설중행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이미 설중행에 대해 안다는 의미였다.

"설소협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구려. 하지만 나는 능대협보다 설소협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소. 어쩌면 설소협만이 지금 곤경에 처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

설중행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장난하지 말라는 모습이었다.

"허언(虛言)이 아니오."

상만천은 표정을 고치며 심각하게 말했다. 절대 농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의미다. 그 말에 설중행은 입가의 미소를 지으며 상만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자는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어쩌다 휩쓸려 운중보에 들어온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상만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정말 농담을 하고 있지 않은지 상만천의 속내를 알아보려는 듯 무례하기까지 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아주 크게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소생에게는 함곡선생과 같이 방대한 지식과 신산귀묘(神算鬼妙)의 계책도 가지지 못했고, 풍대협 만큼 예리한 직관과 뛰어난 무위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설소협은 사람을 앞에 두고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려…."

함곡이 실소를 터트렸다. 칭찬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냥 있다가는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기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중행은 아직 나이로 보아 경험이 부족하다. 어쩌면 상만천의 의도가 일행 중 가장 다루기 쉬운 듯 보이는 설중행부터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잠시 끼어들어 틈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아니오. 설소협은 매우 뛰어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오. 누구나 다 그런 말들을 하지만 설소협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정말 그렇다고 느끼지 않소이까? 핫핫…."

상만천은 아주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가진 자만의 여유처럼 보이는 그 웃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그 뭔가가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함곡의 속내를 이미 알아차린 듯했지만 그는 재차 설중행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물론 함곡선생과 풍대협이 나를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오. 허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설소협의 도움이오."

"...........!"

확실히 농담은 아니다. 좌중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상만천은 정말 집요하게 설중행의 도움을 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상만천이 진심 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상만천의 어조와 태도에는 상대를 설복시키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하마터면 설중행은 고개를 끄떡이며 돕겠다는 말을 할 뻔했다. 허나 설중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소생은 지금 이 운중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역시나 상대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우연치 않게 풍대협께 은혜를 입은 관계로 동행해 앉아있는 것뿐입니다."

거절이었다. 상만천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하는 사람은 중원천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상만천이 일개 범부에 불과한 설중행에게 이리 사정하는 것도 기사(奇事)라면 기사일 터.

"그 말은 풍대협이나 함곡선생께서 나를 돕게 된다면 도와줄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슬쩍 말끝을 흐리며 상만천은 함곡과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것인가? 단지 처음에 능효봉을 두둔하면서 시작한 것이 설중행에게 절실하게 도움을 청한 것이 정작 함곡과 풍철한을 끌어들이기 위함일까?

'결국 목적이 이것이었던가?'

풍철한은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어느 틈에 신태감의 사건에 연루된 용추의 일과 상만천이 가진 중요한 정보 몇 가지를 놓고 하려던 공정한 거래에서 자신들의 도움이라는 덤까지 챙기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곡의 생각도 비슷했지만 그 근본적인 것은 달랐다. 상만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신과 풍철한의 도움이 아니라 설중행의 도움이었다. 설중행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일행인 자신들의 도움을 원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설중행의 도움을 원하는 것이 아니란 판단이었다.

'분명 상만천은 설중행 저 청년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 도대체 설중행…, 저 청년이 어떠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기에 모두 저 친구에 대해 유달리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것이 없다는 함곡이라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상만천에게 굳이 '그거야 설소협이 결정할 일이지요'라든가, '우리 일행과 같이 움직일 것이지요'라고 미리 설중행과 자신들의 관계에 금을 설정해 놓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설중행은 풍철한의 일행이었고 자신의 일행이다. 상황에 따라 설중행은 의외로 유리하면서도 결정적인 패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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