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5회

등록 2006.12.18 08:15수정 2006.12.1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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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집요하게 달려드는 상만천으로부터 설중행을 잠시 보호할 필요가 있다. 자칫 설중행이 마지못해 돕는다는 약속이라도 덜컥 하는 날엔 결정적인 패의 가치를 모르고 아무런 대가없이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설소협의 일은 잠시 미루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 보다는 먼저 용추선생이 어떠한 지경에 빠졌는지, 그리고 상대인께서 가지신 몇 가지 정보가 정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인지 여부부터 알고 싶군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결론을 내놓으면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서로 돕겠다고 결정이 나 버리면 거래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상만천이 노리고 있는 의도인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칫 아무런 대가없이 상만천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중에 그렇게 된다 해도 지금은 분명하게 선을 그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내가 너무 서둘렀구려. 지금 처한 내 상황이 워낙 어려워 내 생각만 한 것 같소. 이해하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처한 상황도 나보다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가진 정보 몇 가지는 여러분 일행의 목숨을 구해 줄 구명줄 같은 것인지도 모르오. 물론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겠지만 말이오."

이것은 자신의 말을 믿게 하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자신은 분명 너희들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정보가 필요할 것이고, 너희 일행인 설중행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자신은 너희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완전하게 믿도록 하는 것이다.

역시 상만천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상만천 역시 함곡 일행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다만 이런 경우 자신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속내를 부분적으로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서 그런대로 순조로운 편이었다.

"이번 거래는 어느 한 편이 더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거래가 될 것 같습니다."


함곡의 말에 상만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함곡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가치를 이미 인정하고 있다. 이제 자신이 가진 것 중 하나 정도는 선물로 던져줄 시기다. 그리고 그 선물은 자신이 아닌 용추가 던져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식사를 다하셨다면 먼저 용추선생을 만나보시겠소? 거동하기 불편하여 이 자리에는 나오지 못하니 말이오."


입가의 기름기를 하얀 천으로 닦아내는 상만천의 왼손가락에는 호박이 달린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바로 신태감이 추교학에게 주었던 그 반지 - 철담이 끼고 있었다는 그 반지와 똑같은 것이었다. 이 안에 있는 누구도 그 반지에 대한 내력을 알지 못했지만 오직 한 사람, 함곡은 저 반지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49

혈간이 살아생전 운중보에 들르게 되면 거처로 사용했던 백호각(白虎閣)은 이제 이승을 뜨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길게 흑백청홍의 비단 천을 양쪽으로 늘어뜨리고 가운데 놓인 관은 일반 상청의 모습과는 달랐다.

다른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 보란 듯이 대들보에 쇠사슬을 내려뜨려 묶은 흉측한 몰골의 두 사내로 인해 방 안은 빈소(殯所)가 아니라 오히려 중죄인을 처벌하는 뇌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핏자국과 더불어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얼굴은 부어있었고, 몸 역시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운중보주와 두 친구들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옥기룡이나 신기수사 옥청량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보기는 흉했지만 저들을 저렇게 매달아 놓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고, 세 사람 모두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간은 구룡 중 혈룡의 독문비기인 혈룡장과 보주의 심인검에 당했다고 했다. 또한 운중보 내에서도 구룡의 무공에 의해 서교민과 신태감이 당했다. 철담의 죽음서부터 일어난 일련의 살인사건들은 결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우발적으로 터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시간적으로나 장소로 보아 흉수는 절대 한두 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분명 운중보 내에 흉수들은 물론 그와 관련된 자들이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붙잡힌 두 명의 사내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고, 분명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이란 예상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 두 사내들을 죽이지 않고 목숨을 붙여 놓은 것은 아직 캐내야 할 배후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들과 관련 있는 자들을 색출해 내기 위한 중요한 미끼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빈소에 보란 듯이 걸어놓은 이유였다. 이들과 관련된 자들은 분명 이것이 덫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일 것이었다.

"그래... 저들에게서 뭔가 알아낸 것이 있었느냐?"

보주의 물음에 옥기룡이 곤혹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자가 미숙하여... 아직... 저 놈들은 오직 북경(北京) 천마방(天馬坊)의 역리(驛吏)라는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천마방의 역리...?"

이상한 듯 눈매를 좁히며 중의가 되물었다. 천마방은 북경 자금성에 필요한 말(馬)을 관리하는 곳. 그곳의 역리(驛吏)라면 아무리 낮아도 관속(官屬)이다. 하지만 중의의 물음에는 관속을 건들었다는 걱정보다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중의는 천마방의 역리라는 말의 속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사람을 정말 혼란스럽게 만드는군."

중의는 고개를 흔들면서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짓던 중의가 다시 물었다.

"혈간과 같이 오던 일행 중 생존자는 없었느냐?"

질문은 옥기룡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옥청량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옥청량의 뒤쪽에 서있는 단혁과 그의 수하들도 힐끗 쳐다보았다.

"생존자는..."

옥기룡이 입을 열자 그의 말을 막으며 급히 옥청량이 대답했다.

"없었소이다. 매우 잔인한 놈들이외다. 철기문의 세 장로는 물론 무공도 모르는 가정(家丁)이나 시비(侍婢) 여덟 명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살해했소이다."

분명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옥기룡에게 말할 때에는 분명 혈간의 숙수(熟手) 하나가 살아남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으음...!"

하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중의와 운중보주는 그 말에 침음성을 터트렸다. 허나 성곤은 표정의 변화 없이 단혁의 뒤에 서있는 작은 체구의 사내를 보았다가 다시 옥청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의가 혈간의 시신이 놓여있는 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관뚜껑을 열어놓은 단혁이 빠르게 관 옆으로 다가가 시립했다. 그것은 조사를 하는데 어떠한 지시도 마다하지 않고 하겠다는 태도였다.

"정말 심인검(心印劍)과 혈룡장(血龍掌)이로군."

성곤의 미세하나마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말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죽음을 당한 친구에 모습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죽은 후에도 엄격함이 배어나오는 혈간의 모습에 더욱 침통한 느낌이었다.

혈간의 전신에는 다른 크고 작은 상처들도 있었지만 심장 부위 위에 붉은 피로 그려놓은 듯한 선명한 장인(掌印)이 이마의 가는 혈선과 더불어 핏방울이 배어나온 뒤 굳어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신의 상체와는 달리 하체에는 상처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천하의 혈간이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 시신으로 누워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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