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6회

등록 2006.12.19 08:15수정 2007.06.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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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혈투를 벌인 끝에 죽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합공을 했다 하나 감히 누가 혈간을 죽일 수 있을까? 운중보주와 혈룡이 현신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물론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지만 단지 두 놈의 합공에 의해 혈간이 당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흉수들이 어떤 경로로 그 두 가지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지만 운중보주나 혈룡과 비견될 바는 아닐 터였다..

"거의 완벽하게 익힌 자들이야…."


@BRI@중의가 혈간의 시신을 세밀하게 살피는 것을 보며 운중보주가 침음성처럼 말을 뱉었다. 그의 말을 인정해야 했다. 남긴 흔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의는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뒤쪽에는 상처가 없는가?"

중의가 묻자 단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비교적 적습니다만 보시겠다면…."

중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보겠다는 의미다. 단혁은 조심스럽게 혈간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이미 영혼이 육신을 떠났다 하나 시신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관에 돌아눕게 하지 않고 굳은 시신을 안아 돌렸다.


비교적 적다고는 했지만 그리 적지 않은 상처였다. 친구는 마지막 혈투에서 무척이나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중의는 특히 혈간의 허리를 가로지른 두 개의 미세한 흔적을 유심히 살폈다. 미세해 언뜻 보기에는 가시에라도 긁힌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이 그 어느 상처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척추를 끊어 놓은 두 개의 흔적. 그것은 아주 무서운 열양병기(熱陽兵器))나 열양공(熱陽功)에 의한 것이었던지 옷가지뿐 아니라 살을 파고든 곳까지 순식간에 태운 듯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치 세필(細筆)로 그린 듯 가늘지만 선명하게 검은 선을 그어 놓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처인지 알아볼 수 있겠나?"

중의는 고개를 돌려 두 친구를 바라보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중의 뒤에 바싹 다가든 두 친구는 그 흔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약간 긴장된 기색과 함께 굳어있었다. 운중보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편안하게 뉘어 놓게."

이제 다 보았다는 의미일 게다. 운중보주의 말에 단혁은 혈간의 시신을 바로 해 뉘고는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시립했다. 운중보주가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야 왜 이 친구가 이리도 허무하게 당했는지 알 것도 같군."

"무슨 말인가?"

"이와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무공은 많지만 혈간에게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무공은 두 가지뿐이네."

"그것이 무엇인가? 설마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네. 구룡 중 뇌룡(雷龍)의 뇌전도(雷電刀)와 바로 성곤 이 친구의 벽라곤(碧羅棍) 뿐이지."

단호한 운중보주의 말에 중의는 더욱 황당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표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운중보주나 성곤 담자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중보주의 음성이 이어졌다.

"내 생각으로는 미세한 선으로 보아 뇌전도 쪽이 아닐까 싶네. 물론 벽라곤의 초식을 도나 검으로 펼쳤다면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겠지."

아무래도 곤(棍)으로는 이렇게 매끄럽고 가는 선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허나 성곤은 고개를 흔들었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네. 내 벽라곤을 구성(九成) 이상 익힌 자라면 곤봉에서 뿜어지는 곤의 기세로 이런 흔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네."

뜻밖이었다. 오히려 감추어도 모자랄 판에 성곤은 자신이 의심받을지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었다. 허나 성곤은 이미 보름 전부터 운중보에 들어와 있었던 터. 중의의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혈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흉수는 세 명이란 말인가? 하기야 뇌검이든 벽라곤이든 심인검에 혈룡장을 익힌 자들 세 명이 합공했다면 혈간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겠군."

중의가 화가 난다는 듯 툴툴거렸다. 운중보주가 고개를 저었다.

"세 명이 합공을 했다는 말은 틀렸네. 혈간의 몸에 난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니 구구한 설명은 하지 않겠네. 심인검과 혈룡장의 상처 흔적은 단 하나뿐이네. 다만 뇌전도이든 벽라곤이든 혈간의 척추를 가른 흔적은 짧은 순간 두 번을 출수했다는 말하고 있네."

"흉수들이 합공을 하지 않았단 뜻인가?"

"인간의 육체에서 발휘될 수 있는 힘에는 한도가 있네. 아무리 최절정고수라 해도 수십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자신보다 한두 단계 낮은 인물들이라도 두세 명이 합공을 하면 힘들어지네. 더구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연수합격을 익힌 자들이라면 당할 수밖에 없네. 하지만 심인검을 익힌 자와 혈룡장을 익힌 자는 합공을 했지만 다른 자는 합공을 한 것이 아니네."

중의나 성곤은 물론이고 좌중은 운중보주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인검의 흔적은 운중보주의 말대로 미간이나 목줄기에 남는다. 혈룡장 역시 심장부위에 노린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터.

"먼저 혈간을 암습했네. 본 것과 같이 허리의 척추부위였지. 이제야 혈간이 왜 이리 허무하게 당했는지 알겠다는 내 말은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었네. 혈간은 이미 척추를 암습 당한 상태에서 혈룡장을 익힌 자와 심인검을 익힌 자에게 합공을 당한 것일세."

척추가 끊어지면 몸을 움직이기 어렵다. 하체는 이미 상체와 달리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

"지금 사인을 보면 심인검과 혈룡장이네. 혈룡장과 심인검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치명적인 부위를 공격했고 매우 정확했단 말이네."

"그게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혈간 정도의 능력이라면 이리 정확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상처로 보아 심인검을 익힌 자와 혈룡장을 익힌 자에게 수십 초에 걸쳐 합공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흉수들이 노리던 단 한 번의 치명적인 공격에 혈간이 대응하지 못하고 상대가 노리던 부위를 정확하게 당했다는 것은 혈간의 몸에 이상이 있었다거나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네. 또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혈간의 하체에는 상처가 거의 없다는 점이네. 흉수들로서는 이미 마비되어 쓸모가 없어진 하체를 공격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제야 중의는 물론 좌중 모두가 운중보주의 말을 이해했다. 역시 천하제일인이라는 자리는 무공만 강하다고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상황은 운중보주가 추측한 것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중의는 운중보주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혈간의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신은 때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죽기 전에 일상과 다른 혈행의 흐름이 나타났다면 시신에는 분명히 그 표식이 남아있게 된다. 죽기 직전 무언가에 맞았다면 살아있을 때 나타나지 않았던 멍이나 피가 몰려있는 자국이 시신에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이 친구는 척추 손상으로 기혈이 일부 막혀 있었네. 혈간이라도 아마 하체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네."

그렇다면 움직임이 현저하게 제약을 받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한 가지 의구심이 남네. 흉수는 어떻게 혈간을 암습할 수 있었을까? 혈간이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이던가? 더구나 심인검과 혈룡장을 익힌 흉수들이 나타나기 이전이라면 혈간이 쉽게 암습당할 인물인가? 더구나 그의 주위에는 항상 철기문의 장로들이 있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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