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7회

등록 2006.12.20 08:12수정 2006.12.20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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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의 지적이었다. 역시 문제는 있었다. 어떻게 흉수가 혈간을 암습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 아무리 뛰어난 살수라 해도 혈간의 이목을 숨기고 그의 주위 오장(五丈)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것까지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 허나 흉수가 측근이나 저 친구가 믿고 있었던 자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습을 한 자는 분명 그의 등 뒤에서 공격을 가했네."


@BRI@말을 하면서 운중보주는 시선을 돌려 단혁과 그의 수하들을 보다가 다시 옥청량에게로 돌렸다.

"생존자가 없다 하니 안타깝구먼. 혹시나 흉수들 말고 누가 혈간을 찾아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하기야 생존자가 있다면…, 그 자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 일이지만…."

말을 하며 바라보는 운중보주의 시선에 옥청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고, 그 사실마저 알리고 혹시나 생존자마저 운중보에 넘기고 나면 자신들은 운중보의 조사나 처사에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 때문에 감추기는 했지만 마치 그러한 사실을 운중보주가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한시바삐 보주가 지적한 그 간의 손님이 없었는지 숙수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구나 힐끗 스치듯 허공에서 엉킨 숙수의 눈에서 무언가 알려줄 말이 있다는 기색이 서려 있어 내심 조바심이 났다.

"헌데 혹시 이 친구와 동행하던 자들 중에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가 있는가? 그저 죽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시체가 회수되지 않은 자가 있느냔 말일세."


"그건…?"

옥청량 자신은 확인하지 못한 일이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단혁을 향했다. 제일 먼저 달려간 수하들이 단혁이 이끄는 구천각의 인물들이다. 단혁은 옥청량의 시선을 받고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시비 한 아이와 노를 잡았던 수하 한 명의 시체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강 위였는지라 흉수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목숨을 잃고 물로 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하마터면 "합니다"라고 할 뻔했다. 지금 저쪽에 수하들과 같이 있는 숙수가 그렇게 보고를 했었고, 그 수하나 시비에 대해서는 단혁도 알고 있었던 터라 운중보주가 걱정하는 것과 같이 혈간어른을 기습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아이들이었다.

"알겠네. 나중에라도 뭔가 다른 사실이 나타나면 알려주게나."

운중보주는 단혁을 비롯해 옥청량, 그리고 옥기룡까지 찬찬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보주의 신선이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서늘한 느낌이 그들의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보주는 더는 캐묻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지금 보주에게 급한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아직 살아 남아있는 두 친구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머지 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나름대로 결론을 낼 필요가 있네."

성곤이 불쑥 말하면서 빈소로 되어 있는 백호각의 가장 넓은 방을 나섰다. 그들 나름대로 결론을 내자면 그들만의 공간인 조용한 곳이 필요할 터였다.

"내 꼴을 보니 말이 아니지?"

용추 백리현이었다. 풍철한 일행을 모두 물리고 함곡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던진 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침상에 누워있는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핏기를 찾아볼 수 없고, 입술은 바싹 말라붙어 매우 심한 내상을 입은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어쩌다 이리 당하셨소? 더구나 나타나면 무림에 피바람을 가져올 수 있는 절세비공을 익히고도 말이오?"

옥룡의 옥음지를 가리킴이다.

"비꼬지 말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절세비공을 가져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학문이라면 몰라도 무공은 우리에게 맞지를 않지. 더구나 나이를 먹고 익혀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익힌 것이 얼마나 그 위력을 발휘했겠나?"

사실 맞는 말이었다. 어떠한 것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무공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수련을 쌓고 운기토납으로 기초적인 내공을 쌓은 후에야 비로소 무공에 입문할 신체가 되는 것이다.

"무공을 익힌 후 처음으로 진짜 상대와 목숨을 걸고 드잡이질한 것이네. 더구나 세 명이었네.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행이었네."

메마른 입술에 씁쓸한 고소가 스쳐 지나갔다.

"첩인장(疊燐掌)에 당했소?"

"자네마저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가?"

"부인하지 않겠소.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오."

말은 그러했지만 아니었다. 용추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신태감과 같은 동창의 고수를 상대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상만천과의 거래를 앞두고 최대한 도움 될만한 것은 챙겨두어야 한다.

"너무나 공교롭게도… 신태감의 몸에는 옥음지의 흔적이 분명했고, 용추께서는 신태감의 독문무공이랄 수 있는 첩인장에 당했소. 더구나 시각이나 장소도 비슷하오."

"공교로운 것이 아니지. 아주 완벽하고 치밀한 것이지."

"재미있구려. 천하의 용추선생을 이리 완벽하게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말이오."

용추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파리한 안색에 눈까지 가늘게 뜨자 마치 경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보였다. 두 사람 간의 대화가 끊기며 용추는 가는 눈매로 한참이나 함곡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넨가…? 자네였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함곡이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분명 내 말뜻을 알면서 모른 체하는군. 하지만 가끔은 솔직해져 보는 것도 좋은 일이네."

"어리석은 솔직함을 이용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오."

용추는 눈을 감았다. 아직 함곡은 자신에 대한 감정을 풀지 않았다. 사실 함곡을 이용하고자 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용추가 아직도 함곡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의 그 일이야 어쨌든 지금 다시 그 일을 끄집어내어 정리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어쨌든 좋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렇듯 치밀하고 완벽한 계책을 꾸밀 수 있는 인물은 중원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네. 더구나 이 운중보 내에서 흐르는 괴기한 사건들의 치밀함을 보거나, 더군다나 나를 이리 쉽게 함정으로 몰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은 찾기 어렵다네. 있다면 오직 자네지."

그 말에 함곡은 실소와 더불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구려. 하지만 용추께서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소."

"자네라면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말이지."

장난으로 던져본 말이 아니었다. 용추의 얼굴에는 어느 정도 확신이 떠올라 있었다. 함곡이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용추께서는 자신마저도 과대평가하고 있구려. 이 세상엔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있소. 우리 두 사람은 운이 좋아 중원에 소문난 것뿐이오. 세상에 알려진 인물보다 은거해 있는 고인(高人)이 더 무서운 법이오."

"나는 잠재되어 있는 사실은 믿지 않는 성격이네. 나타난 것을 믿을 뿐이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마치 잘 짜인 각본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춤추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네."

"그 점은 나 역시 인정하오."

"자네 동림당(東林黨)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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