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자와 함께 노숙하다

[태종 이방원 19] 라이벌과의 하룻밤

등록 2006.12.26 18:16수정 2006.12.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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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여자 강씨를 바라보는 순간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BRI@오뚝한 콧날, 뭔가 모를 욕망을 간직한 도톰한 입술, 시원시원한 검은 눈동자, 모든 것을 받쳐주는 하얀 피부, 덧붙여 귀엽게 생긴 귓불이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여자를 보는 눈이 꽤 높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를 보는 이방원의 눈이 예사롭지 않아서일까? 여자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일까? 훗날 등극한 태종 이방원은 비·빈 제도를 고쳐가면서까지 조선조 역대 임금 중에서 제일 많은 부인을 두었다. 비공식을 빼고 자그마치 29명이나 된다. 슬하에 21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로 인하여 원경왕후 민씨와 갈등을 겪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 불꽃이 튀기는 것을 의식했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뭔가 모를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이방원의 생애에 라이벌이 있었다면 서모 강씨와 정도전이다. 강씨와는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각을 세웠고 정도전과는 권력을 두고 대척점에 섰었다. 그 중에 한사람 강씨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기이하게 만난 것이다.

어머니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젊은 여자

그리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도무지 서모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라 부르기가 입에 떨어지지 않았다. 방원이 조숙해서 일까? 그저 누나 같고, 조금 나이 더 먹은 친구 같았다. 이때 강씨 나이 서른 둘. 이방원 스물 하나. 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연상의 여인이었다.

"아버님께서 함흥으로 모시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어머니라 부르기에는 너무 젊었다. 호칭을 생략하고 두루뭉스르 하게 넘어갔다. 강씨 역시 자신이 모시는 지아비의 아들이지만 하대를 못했다. 나이도 그러려니와 관례를 올린 청년이고 장가 든 새신랑이었기 때문이다.

"함흥은 왜요?"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개경으로 오라는 소식은 반갑게 들리지만 함흥으로 가라는 것은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 개경의 권력자들은 고향에 향처(鄕妻), 개경에 경처(京妻)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반대였다. 아이들 공부를 위하여 개경에 정실부인 한씨를 거처케 했고 제2부인 강씨를 자신의 임지로 데리고 다녔다. 개경 출신 강씨는 이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황급히 함흥으로 모시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나 혼자만 함흥으로요?"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한씨는 여기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고 자신만 함흥으로 가라는 것이냐, 라고 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두 분 다 모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강씨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졌다 지워진다. 이제야 마음이 풀어지는 모양이다. 철현 전장에는 개경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노복들이 그대로 있었다. 일꾼들을 재촉하여 짐을 꾸렸다. 강씨는 이것저것 다 챙겨 짐이 많았지만 방원은 최소한의 짐으로 줄이자고 독려했다.

짐 속에서 칼을 발견하고...

"아니 이건 무슨 환도입니까?"

강씨의 짐 꾸러미 속에서 기다란 칼을 발견한 방원은 흠칫 놀랐다.

"아버님께서 쓰시던 칼입니다. 함흥으로 가는 길이 하도 험하니 쓰임새가 있을지 몰라 챙겼습니다."

방원은 새삼스럽게 놀랬다. 아버지의 제2부인 강씨가 시원시원스럽고 화통하다는 첫인상이었는데 조심성 있고 철두철미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짐을 꾸리느라 정오가 지나서 출발했다. 우마차 3대에 노복들이 50여명. 작은 식구가 아니었다.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 피난부대였다. 방원은 맨 앞에 말 타고 행렬을 이끌었다. 첫 번째 우마차에는 중요한 짐 보따리와 한씨가 타고, 두 번째 우마차에는 방번과 방석을 데리고 강씨가 탔다.

세 번째 우마차에는 누이동생들이 타고 노복들은 걸었다. 우마차에 올라탄 방석과 방번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좋아라 어쩔 줄을 모른다. 철없는 아이들은 우마차가 어디로 가는지? 왜 떠나는지? 알바 아니었다. 우마차 타고 어디론지 간다는 것이 신나는 일이었다.

서산에 해가 걸쳤다. 포천을 다 빠져나가지도 못하여 어두워졌다. 움직이는 인원이 많다보니 속도가 느렸다. 백운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가에 야영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노숙자가 된 셈이다.

우마차에 실려 있는 가마솥을 끌어내려 돌을 세우고 밥을 지어 먹었다. 노복들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잠에 떨어졌다. 모기들이 극성을 부려도 꿈쩍하지 않았다. 50여명을 인솔해야 하는 방원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목적지 함흥까지 인솔해 가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가 크게만 느껴졌다

"큰 부대를 이끌고 다니셨던 아버님은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까?"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수 만, 수십만 군사를 지휘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 없는 자리가 크게 보였다. 가솔들이 깊은 잠에 떨어진 주위를 서성이던 방원은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님은 지금쯤 어디에서 저 별을 보고 계실까?"

궁금했다. 어디에선가 아버지도 잠 못 이루고 저별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평양은 지나셨을까?"

아버지의 결단이 실패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거나 사로잡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유동적이지 않은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 튀어나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지 않은가. 걱정이 앞섰다. 상황을 알지 못하니 답답했다.

"평양에 있던 큰형과 넷째 형은 무사할까?"

최영의 명에 따라 우왕을 호종한 방우와 방간도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잠 못 이루는 방원의 뇌리에 개경의 아내 민씨는 잠시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기가 극성을 부린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여울을 타고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린다.

"압록강 물소리를 들으며 아버님은 무슨 결단을 내리셨을까?"

개울가 언덕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빛이 빛나고 있었다. 군사를 돌린 아버지 이성계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밤은 깊어갔다. 훗날 죽고 죽이는 대립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강 씨와의 기이한 첫날밤은 이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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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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