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얻어라

[태종 이방원23] 토지개혁

등록 2007.01.05 09:40수정 2007.01.0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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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시가전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개경은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철시했던 개경의 번화가 십자로의 시전(市廛)도 문을 열었다. 연복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여인네들의 발걸음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정문 어름에 있는 홍등가도 빼꼼이 문을 열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 난리 통에 머시기 장사는 좀 거시기 하기 때문이다.

선의문(宣義門) 밖 벽란도 가는 길목에 있는 개성 한우물(開城大井)은 피아간에 시신이 수북이 쌓여 마시지 못했지만 명나라와 서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바리바리 수레에 실려 개경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예성강 포구는 국제 항구였다. 향신료와 장신구를 가득 실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백성들의 마음도 대체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왕을 내쫓다니 묵과할 수 없다"는 불용파와 "왕도 잘못하면 쫓겨나야지"라고 받아들이는 용인파다. 평소에 "정치는 왕이나 하고 권문세족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이 무신 정치?"라며 도리질하던 백성들도 이번 사태만큼은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외견상 평온과 질서를 유지한 것 같은 권력의 세계는 수면 하에서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색(李穡)을 구심점으로 하는 유학자들의 왕당파와 조민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군인세력, 그리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혁명불사 진보세력이다. 이들은 자파의 색깔을 분명히 들어내며 세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고려 왕조를 사수하라

@BRI@이색을 정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든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 왕당파는 이성계 진영에서 흘러나오는 '차기 왕 이성계 추대론'에 대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성계를 차기 왕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망발이었다.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한 반란군 수괴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조차도 내키지 않았는데 그 장본인이 용상에 오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민왕에서 우왕, 창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금방 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왕조지만 그래도 500년 고려사직을 이어가는 왕조다. 여기에서 이씨가 왕조를 이어받는다면 계통이 달라진다. 역성을 의미하지 않은가? 왕당파에겐 목숨 걸고 저지해야 할 지상의 과제였다. 자신들의 가슴에 담아둔 양심과 학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거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구파 군벌이 물러나고 신흥 군벌이 전권을 장악한 개경은 권력 판도에서 미묘한 흐름이 포착되었다. 혁명군의 쌍두마차 조민수의 집은 썰렁한 반면 부흥산 아래 이성계의 집은 드나드는 사람으로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성계의 목청전보다도 추동에 있는 방원의 집에 더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성계보다 이방원이 더 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 상대가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자산이다. 우선 나이에서 약관을 갓 넘은 파릇파릇한 청년이다. 방원과 대화의 상대자들은 30~40대, 또는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50대들이다. 그러니까 편하게 대하고 스스럼없이 가까이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원과 대화를 시작하면 또 한 번 놀랜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이가 웬 속은 그리도 깊은지… 무슨 얘기나 가리지 않고 다 소화시킨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는 버려야 할 모레가 많지만 그래도 끝까지 들어준다. 이번에 보석을 건져내지 못하면 다음에 보석을 건질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33칸 사랑채에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모든 정보는 방원의 집으로 통했다. 개경의 실력자 민제가 이방원을 사위로 맞아들일 때 대궐같이 큰 99칸 집을 추동에 지어줬다. 친구 하륜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중 3분지1에 해당하는 33칸을 사랑채로 지었다. 지으면서도 친구 하륜에게 "함흥 촌놈에게 이렇게 큰 사랑채가 과하지 않나요?"라며 방원을 무시하고 하륜에게 핀잔을 주던 일이 있었다.

예전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어 을씨년스럽고 흉측하기까지 했던 사랑채가 이제야 세월을 만난 셈이다. 33칸 방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꽉꽉 들이차고 그것도 모자라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방원은 이럴 때 일수록 잘해야 한다고 아랫사람들을 독려했다. "문턱을 넘어온 손님이 문턱을 넘어 갈 때 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라."

이방원의 이러한 열정이 열매를 맺어서일까? 허접한 쓰레기성 정보도 많았지만 순도 높은 양질의 정보도 섞여 있었다.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방원은 정보를 대하는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고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성계도 잘 모르는 군 관계 정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료사회의 첩보, 백성들의 민심동향, 황실의 동정,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가 모르는 조민수에 대한 특급정보와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정보까지 방원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남해안 바다건너 일본 정보까지 망라되었다.

정보라고 해서 다 정보가 아니다. 생선에도 선도가 있듯이 정보에도 선도(鮮度)가 중요하다. 이미 공개된 정보는 정보로서의 희소가치를 상실한다. 순도((純度)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싱싱한 정보라 해도 신뢰성에 문제가 있으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하락한다. 이방원이 공을 들여서 일까? 접수되는 정보들은 대체적으로 선도도 좋았고 순도도 좋았다.

"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손에 넣어라"

방원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이후 방원의 행동반경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성공한다. 정보력 때문이다. 이방원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엄격히 말해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성리학자도 아니다. 아버지가 무인이었지 방원은 무인이 아니었다. 권력 추구형 정보 장악사(掌握士)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5,16 직후.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어쩌고 하는 혁명공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JP가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과 12.12 하극상 이후 반란수괴가 보안사와 정보부를 장악한 것으로 보아 혁명아들은 정보를 좋아하나 보다. 이로 미루어 혁명에게 정보는 좋은 먹잇감이며 혁명과 정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에 있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새롭게 접수되는 정보는 분석하여 토론에 부치고 대응방법을 논의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방원과 토론그룹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이색(李穡) 진영에서 흘러나온 모종의 특급정보가 있는데 아직 알맹이에 접근하지 못하여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보안 유지가 너무나 철저하여 파고들지 못해 답답했다.

이색 진영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분명 있긴 한데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었다. 우선 목표물을 조민수로 돌리기로 했다. 토지개혁이다. 조민수를 대표 목표물로 설정했지만 과하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모든 권문세족과 사찰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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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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