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동의 주산 격자봉의 모습김준
지금의 보길도는 체도 외에 중리(통리 포함), 백도 등이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예작도나 장사도처럼 섬이었다. 장사도와 예작도를 제외한 섬들은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 등 사구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는 노화도, 소안도와 함께 동일한 생활권에 속하며 청별과 보길도 이목리, 중리와 소안도 맹선리를 잇는 뱃길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은 여관과 식당이 있어 번화가가 되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두 섬을 연결하는 나룻배와 뱃사공이 있었다.
@BRI@포구에는 사공이 거쳐하는 작은 집이 하나 있었고 안쪽에 몇 가구가 포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노화읍에 속했던 보길도 주민들은 행정 일은 물론 장이라도 볼라치면 배를 타고 노화읍으로 나가야 했다. 이렇게 뱃길을 이용하고 봄과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사공에게 주곤 했다.
보길도가 기록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동국여지승람> 보길도 산천조에는 '둘레가 63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조선후기 호구총서(1789)에는 대여길항, 소여길항, 부용동, 월송정, 득문리, 중리, 정자리, 황원동, 통리, 선창구미 등이 확인된다.
이들 마을들은 모두 보길도 동북쪽에 위치해 해남과 연결되는 마을들이며, 부용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황원포 좌우에 위치해 있다. 남쪽해안은 망월봉, 격자봉, 광대봉 등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계절풍이 심하고 앞에 막아주는 섬들이 없어 사람들이 정착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보길도 동남쪽에 자리한 예송리의 경우도 마을 앞에 울창한 상록수 방풍림이 조성되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
1748년 고산의 손주 윤위가 지은 <보길도지>(甫吉島識)는 당시 주민들의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에는 사는 사람들이 적어서 벼랑 위나 암석에 의지하여 수십호가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새와 들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무 그늘이나 풀 밑에서 자고 쉬며, 고사리도 따고 상수리와 밤을 줍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짐승들과 벗한다.
이 시기에 보길도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노화도와 가까운 중리 여항리 통리, 동남부의 예송리, 서북부의 정자리 정도였다.
고산은 왜 부용동에 자리를 잡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