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은 왜 보길도에 갔을까

[섬이야기 53] 전남 완도군 보길도

등록 2007.01.08 15:33수정 2007.01.0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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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세연정

세연정 ⓒ 김준

작심하고 나섰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섬을 새삼스레 이야기하는 것은 늘 부담스럽다. 딱 20년쯤 되는 것 같다. 배가 섬에 닿지 않아 중리 앞 바다에서 작은 목선(종선)으로 바꿔 타야 했다.

철지난 민박집은 텅 비어 있었고, 해수욕장은 동네아이들의 차지였다. 이젠 여름철이면 해남 땅끝과 완도 화흥포 선착장에 줄을 서 한 참을 기다려야 배를 탈 수 있고, 겨울은 물론 봄과 가을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고 있다. 연간 50여만 명이 찾는 섬들 중 손에 꼽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보길도를 찾는 것은 경치도 좋고 해수욕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에 고산이 있기 때문이다.


영암군에 속하던 보길도는 1896년 완도군이 설군 되면서 보길면으로 독립된 후 1914년 노화읍과 통합되었다. 1986년 보길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전복과 톳 양식, 멸치잡이 등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보길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서남해안 섬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조상들은 언제부터 섬에 살았을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족보'와 '비석'이다. 최초로 섬에 들어온 조상들을 '입도조'라고 한다. 지금 보길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족보를 분석해 보면 다른 서남해역 도서지역과 마찬가지로 16세기부터 시작해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입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도서문화, 13집).

입도조의 분석과 옛날 섬지역의 경관을 재구성한다면 400~500여 년 전의 섬의 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입도조 이전에도 섬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패총과 토기 편 등 수습된 유물들을 분석해보면 선사시대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유민들이 관리들 몰래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서지역은 오히려 조세와 부역을 지지 않아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살만한 곳이었다. 중앙권력이 도서지역에까지 힘을 쓰기 시작하던 시기에 도서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는 농사가 제한적이고 수산물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1896년 완도군과 지도군 등 행정기관이 독립되기 전 파견된 관리(대리인)들의 수탈이 극심했고, 수군이 배치되고 목장과 토지, 관둔전이나 궁방전 등을 국가나 특권계층이 관할할 경우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기 그지없다.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 '보길도'


a 부용동의 주산 격자봉의 모습

부용동의 주산 격자봉의 모습 ⓒ 김준

지금의 보길도는 체도 외에 중리(통리 포함), 백도 등이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예작도나 장사도처럼 섬이었다. 장사도와 예작도를 제외한 섬들은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 등 사구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는 노화도, 소안도와 함께 동일한 생활권에 속하며 청별과 보길도 이목리, 중리와 소안도 맹선리를 잇는 뱃길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은 여관과 식당이 있어 번화가가 되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두 섬을 연결하는 나룻배와 뱃사공이 있었다.

@BRI@포구에는 사공이 거쳐하는 작은 집이 하나 있었고 안쪽에 몇 가구가 포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노화읍에 속했던 보길도 주민들은 행정 일은 물론 장이라도 볼라치면 배를 타고 노화읍으로 나가야 했다. 이렇게 뱃길을 이용하고 봄과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사공에게 주곤 했다.

보길도가 기록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동국여지승람> 보길도 산천조에는 '둘레가 63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조선후기 호구총서(1789)에는 대여길항, 소여길항, 부용동, 월송정, 득문리, 중리, 정자리, 황원동, 통리, 선창구미 등이 확인된다.

이들 마을들은 모두 보길도 동북쪽에 위치해 해남과 연결되는 마을들이며, 부용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황원포 좌우에 위치해 있다. 남쪽해안은 망월봉, 격자봉, 광대봉 등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계절풍이 심하고 앞에 막아주는 섬들이 없어 사람들이 정착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보길도 동남쪽에 자리한 예송리의 경우도 마을 앞에 울창한 상록수 방풍림이 조성되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

1748년 고산의 손주 윤위가 지은 <보길도지>(甫吉島識)는 당시 주민들의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에는 사는 사람들이 적어서 벼랑 위나 암석에 의지하여 수십호가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새와 들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무 그늘이나 풀 밑에서 자고 쉬며, 고사리도 따고 상수리와 밤을 줍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짐승들과 벗한다.

이 시기에 보길도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노화도와 가까운 중리 여항리 통리, 동남부의 예송리, 서북부의 정자리 정도였다.

고산은 왜 부용동에 자리를 잡았을까

a 세연정 안내도,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빗금친 부분이 세연정 자리며, 동대에서 옥소대로 가는 세연지의 물길을 막는 판석보가 있다.

세연정 안내도,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빗금친 부분이 세연정 자리며, 동대에서 옥소대로 가는 세연지의 물길을 막는 판석보가 있다. ⓒ 김준

고산은 선조 20년(1587)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나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등 다섯 임금을 거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문학인이었다. 현종대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 서인의 대표 격인 송시열을 비판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미 몇 차례 유배와 해배를 거듭한 고산은 함경도 유배를 거쳐 보길도 부용리에서 10여 년 동안 은거하다 문서동 골짜기 낙서재에서 현종12년(1671) 85세로 운명했다. 고산이 마지막 숨을 쉬었던 낙서재는 지금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고산이 부용동에 자리 잡은 것은 풍수지리, 가계경영, 자급자족할 경작지의 보유 등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부용동은 격자봉(425)를 주산으로 동쪽에는 광대봉(310), 서쪽에는 망월봉(364) 등 크고 작은 산이 동남쪽과 서남쪽 해안으로 둘러싸여 배산임해(背山臨海)의 형국이다. 이들 산들은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산이며 절경이다.

부용동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은 배를 타고 황원포를 통해서 세연정까지 5리, 낙서재까지 10리를 들어가야 한다. 해남에서 들어올 때 장사도가 앞을 가리고 있어 부용동은 전혀 밖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은거지로 꼽힌다.

고산이 보길도에 은거지를 마련하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사대부들이 너도 나도 새로운 집 자리를 찾던 무렵이다. 대부분 최고의 풍수 전문가들을 앞세워 사대부들이 산과 계곡을 찾았지만 고산이 보길도에 주목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a 사각형으로 땅을 파  세연지의 물을 끌어 와 만든 인공연못 회수담

사각형으로 땅을 파 세연지의 물을 끌어 와 만든 인공연못 회수담 ⓒ 김준

a 격자봉에서 흘러온 계곡에 판석보를 쌓아서 만든 자연못 세연지.

격자봉에서 흘러온 계곡에 판석보를 쌓아서 만든 자연못 세연지. ⓒ 김준

해남을 세거지로 한 윤씨가는 간척을 통해 개인의 토지를 확대한 대표적인 경우다. 고산의 고조부인 윤효정 이후 해남에 거주하기 시작한 윤씨가는 해남 일원의 갯벌들을 입안을 받아서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윤씨가는 해남 외에도 진도 굴포, 노화도, 고금도 등 도서지역의 간척에 큰 관심을 가졌다.

고산이 보길도에 주목한 다른 이유는 날로 확대되어가는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보길도는 이들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이며 해남의 본가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안전한 가옥이었던 셈이다.

특히 작인들의 힘이 강해진 조선후기나 한말 부용동의 역할은 더욱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뱃길을 이용한 물산 이동이 편리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서남해의 도서지역을 오갈 수 있는 거점으로서 보길도는 적절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6, 17세기의 부용동 일대는 보길도에서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었다. 지금은 통리와 월송리 사이의 갯벌을 메워 농지를 조성하는 등 크고 작은 논과 밭이 있지만 당시 계곡물에 의존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은 100여 두락의 규모의 부용동뿐이었다. 40여 년 전 양식어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보길도에서 육지로 유학을 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곳도 농사깨나 짓는 부용동 일대의 주민들이었다.

부용리로 가는 길목 보길초등학교 옆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별서조원(농장이나 들에 지은 집) 세연정(洗然亭, 1992년 복원)이 있다. 황원포에서 출발해 부용리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연정을 거쳐야 했다. 외지인의 출입을 감시할 수 있고, 손님을 접객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개울물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방식으로 세연지라는 연못을 만들고 인근 큰 바위를 옮기고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지은 정원이 세연정이다.

연못 건너편 좌우에 춤추는 무대(동대와 서대)를 만들었다하니 가희 그의 권력을 가늠할만하다. 계곡을 따라 4km로 남짓 오르면 낙서재가 있고, 낙서재를 등지고 고산이 은거하면 책을 읽었다는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동천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a 세연정에서 내려다 본 동대의 모습, 고산은 세연정에 올라 기생들이 춤추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세연정에서 내려다 본 동대의 모습, 고산은 세연정에 올라 기생들이 춤추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 김준

a 세연정에 앉아 눈 내리는 세연지를 바라보다.

세연정에 앉아 눈 내리는 세연지를 바라보다. ⓒ 김준

a 세연정에 앉아 눈 내리는 회수담을 바다보다

세연정에 앉아 눈 내리는 회수담을 바다보다 ⓒ 김준

고산이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구전설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남을 출발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도선은 풍랑이 심해 보길도 대풍항에 정박을 했다. 이날 그의 꿈에 신선이 나타났다. "굳이 제주로 갈게 없다. 보길도가 제주에 지지 않을 락지(樂地)이니 이곳에서 지내라"고 현몽했다.

이튿날 뱃머리를 돌려 장사도(현재 노화도와 다리를 연결하는 보길도 앞의 섬) 옆 등문에 배를 대고 10리 쯤 골짜기를 올라가니 산이 에워싼 모습이 부용화가 피어오르는 듯싶은 섬이었다. 분지 안에 계곡물이 흐르고 100여 두락 이상의 전답이 널려 있어 마치 신선이 살만한 명당이었다.

세연정을 비롯해 고산의 유적은 대부분 새로 복원했지만 판석보와 세연지와 회수담 안의 큰 바위들은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세연지는 판석보를 막아 만든 자연못에 가깝다면 회수담은 파서 만든 인공못이다. 격자봉에서 골을 따라 흘러내린 모든 물은 세연지에 모이며, 판석보에 막혀 네모난 회수담으로 모인다.

회수담 안에는 큰 돌을 놓아 태극모양으로 흐른 다름 빠지도록 만들었다. 자연못과 인공못 사이에는 세연정을 지었다. 판석보를 거쳐 150m 쯤 오르면 옥소대가 있다. 이 옥소대에서 풍악을 울리면 소리가 세연정 을 둘러싼 토성에 부딪혀 소리가 세연정으로 깔리고, 세연정 북쪽 옆에 쌓아 올린 동대와 서대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동자는 못에서 연심을 따고, 세연정에 낚시를 드리우면 선경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산골 깊은 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못을 파고 돌을 옮겨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인근 보길도는 물론 인근 노화도의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보길도는 진도와 완도 고금도의 중간이 위치해 있다. 진도의 굴포에는 고산이 간척한 농지를 부쳐 먹던 많은 작인들이 있었고, 고금도도 마찬가지였다. 당쟁과 당파로 현실정치의 한계를 절감한 고산이 해남의 연동리 종택을 두고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치밀한 분석은 아니었을까.

고산은 세연정 맞은 편 안산 중턱에 한눈에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동천식실이라고 부르는 이 정자는 단칸집으로 주변에는 석문, 차바위, 석담, 석천, 희황교, 석계 등이 있다.

조선시대 정원문화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는 동천석실은 시화를 즐기며 차를 마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책을 읽던 낙서재와 개인적인 휴식공간인 곡수당을 짓기도 하였다. 곡수당은 진도와 고금도에 간척사업이 완성될 무렵 고산의 아들 학관은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두 논객 남도 끝 작은 섬에서 만나다?

a 우암이 보길도 백도리 바위에 새긴 글씨

우암이 보길도 백도리 바위에 새긴 글씨 ⓒ 김준

a 16~17세기 사대부들의 풍류와 제방 축조기술을 엿볼 수 있는 판석보, 서인과 남인의 생사를 건 논쟁을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16~17세기 사대부들의 풍류와 제방 축조기술을 엿볼 수 있는 판석보, 서인과 남인의 생사를 건 논쟁을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 김준

남인 고산과 치열한 예송논쟁을 벌렸던 서인의 대표 송시열의 흔적도 보길도에 남아 있다. 우암은 숙종이 장희빈을 통해서 얻은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하자 정통성을 문제 삼다 제주도로 유배당한다. 남인과 서인의 대표를 보길도에서 만나게 한 것은 바다였다. 험한 뱃길에 잠시 보길도 백도리에 머문 우암은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글을 남겼다.

당시 중앙에서 벌어졌던 정쟁의 흔적을 세연정의 판석보를 둘러싼 설화에서 엿볼 수 있다. 남인이었던 고산이 서인들을 피해 부용동에 살면서 집에서 밥 지을 때 나오는 연기를 다리(판석보)로 보내 흩어지게 해 은거지를 위장했다.

특히 부용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놓인 다리는 굴뚝처럼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면 5리나 떨어져 있는 낙서재에서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판석보는 계곡물을 막아 물을 가두고, 논에 물을 대듯 인공못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넘치는 물이 떨어지는 폭포소리가 웅장하도록 속을 비웠다고 전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고산이 그렇게 경계했던 서인의 대표 우암 송시열이 유배 길에 머무른 곳이 보길도 백도리이다. 풍랑 때문에 잠시 머물렀다는 설과 병을 얻어 치료차 정착했다는 말이 전한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세연정 위에 '말무덤'도 고산이 부용동에 궁성을 짓고 반정음모를 꾸민다는 서인들의 모함을 듣자 키우던 말을 죽여 결백을 알렸던 흔적이라고 전한다.

당시 당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엿볼 수 있다. 왕에게도 거침이 없었던 이들이 대자연 앞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산의 어부사시사와 우암이 백도리 '글씐바위'에 새긴 암각시문은 답을 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보길도 처녀 쌀 서말 먹고 시집가기 어려웠다'입니다. 보길도 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어지는 기사는 '보길도 처녀 쌀 서말 먹고 시집가기 어려웠다'입니다. 보길도 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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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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