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9회

등록 2007.01.09 10:06수정 2007.01.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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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다리시랍니다."


한사코 나중에 찾아오시라고 했던 시비에게 자신들의 이름과 용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용봉쌍비까지 흔들어 대자 마지못해 시비는 쪼르르 달려 들어가 궁수유에게 자신들이 왔음을 알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여자가 머무는 규방에 쳐들어가려 했으니 시비라면 당연히 말려야 할 일.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중요한 손님이 안에 있는 듯 하여 두 사람은 빈청이라고 보이기는 하나 탁자가 하나 달랑 놓여있는 조그만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는 시비는 아무 말 없이 다기를 놓아주고는 횅하니 나가버렸다.

"이 꼴로 왔으니 이 정도의 푸대접은 감수해야지."

능효봉이 비라도 피할 곳을 찾은 게 다행이라는 듯 싱글거렸다. 이미 서향을 사용한다는 운중각의 시비인 운향(蕓香)이란 아이와 찬모(饌母)인 유하(柔芐)란 여인은 만나보았다. 시비나 찬모답지 않게 다소 예의와 말하는데 조리가 있었지만 특별히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단서는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어차피 기대를 가지고 조사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조사는 어차피 뒷전이었다. 과연 백호각에 푸줏간의 고기처럼 걸려있는 비영조의 동료 두 명을 언제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그들의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아직까지 서로 말은 하지 않았다. 구해낼 방도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함곡과 풍철한으로부터 용봉쌍비를 받아들고 나온 그때부터 그들을 주시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인하여 의논하기 영 불편했다.


분명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 만이 아니었다.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누군지 밝혀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은 운중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손님도 아니었고, 함곡이나 풍철한처럼 이 사건을 조사하는 분명한 임무도 맡지 않은, 어찌 보면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없는 그저 방관자에 불과했다.

'그들을 그냥 둘 것이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설중행이 전음으로 물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어차피 설중행이 물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대답은 금방 나왔다. 능효봉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저들을 저렇게 그냥 둘 수는 없소.'

'나 역시 자네와 생각은 다르지 않아.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아주 다른 법이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일을 회피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지.'

구하고 싶은 마음이야 능효봉이라고 없을까? 그러나 그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심각한 난제가 산재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출해 내기도 어렵지만 단지 구출해 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흉수를 잡을 수 있는... 아니 최소한 흉수의 끄나풀이라도 잡아낼 수 있는 두 사람을 소홀히 놔둘 것 같아? 그들을 버젓이 그곳에 왜 보란 듯이 걸어놓았을 것 같나? 우리를 기다리는 거야. 옥청량은 오히려 함정을 파고는 그 두 사람을 구하러 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구."

당연한 지적이었다. 능효봉에 비해 연륜과 경험이 적다고는 하나 설중행이 그런 정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는 내 동료가 지척에서 고통스럽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황을 보고 있을 수는 없소.'

'그들과 같이 죽겠다는 건가?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구?'

'동료를 구하다 죽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죽이는 길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지. 나는 나흘 전 부상을 입은 전육(前六)을 내 손으로 죽였다. 그 역시 그것을 원했어. 지금 저들도 우리가 죽여주길 바랄 것이다.'

'정말 잔인하구려.'

'어차피 우리가 비영조에 몸담은 그 시간부터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어. 동료의 생명만 아까운가? 영문도 모르고 우리에게 죽어간 많은 영혼들은 불쌍하지 않고…?'

더 이상 의견은 좁혀지지 않는다. 타고난 천성 탓만은 아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능형은 하지 않아도 좋소. 나 혼자 하겠소.'

결론은 그것이었다. 설중행의 고집은 무모할 정도여서 간혹 능효봉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능효봉이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저 놈의 비는 언제나 그치려나?"

하지만 그 순간에 능효봉은 전음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동료 또는 친구 간의 대화에서 가장 기분 나쁜 것이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 싫으면 마쇼'라는 식의 고집으로 인한 대화의 단절이다. 근거나 논리와는 거리가 먼 이런 식의 무모한 고집과 결정은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미친 자식…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설중행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애꿎은 차만 홀짝였다.

'이 자식아… 구한 후에는 어떡할래? 그들을 어디에 데리고 있으려고…? 네 방에라도 감추어 놓으려고….?'

불가능한 일이다. 함곡이나 풍철한의 일행의 이목을 피하기도 어렵지만 그들이 그것을 묵인한다 해도 만약 다른 자들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함곡이나 풍철한 일행도 문제가 생긴다.

'두 군데 있소. 바로 이곳과….'

'여기…? 궁수유가 네 첩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능효봉은 여전히 비아냥거렸다.

'내 말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요.'

'어쭈…?'

'일단은 구해낸 다음 추격을 따돌리기 쉽게 생사림(生死林)으로 튈 거요.'

'생사림…?'

보주만이 다니는 길이다. 바로 운중각에서 뒷산에 있는 세 개의 무덤으로 갈 수 있는 길에 있는 방원 백장(百丈) 정도의 숲을 언제부터인가 생사림이라 불렀다. 그리고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이름만큼 무시무시한 곳은 아니었다. 무덤이 놓여있는 죽음의 뒷산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아래의 운중각 사이의 경계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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