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0회

등록 2007.01.10 09:39수정 2007.01.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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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으로 약속이 된 듯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 운중보주를 제외하고는 단지 일 년에 두 번 공식적으로 제를 지내기 전에 운중각의 시비들만이 오르내리곤 했다.

그 시비 중 하나가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중에 따로 올라갔다가 숲에 홀려 반나절을 헤맸다는 말이 전해지고, 그 이유로 생사림에 보주가 직접 진을 설치해 놓았다는 말이 떠돌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보주의 아픈 과거를 묻고 있는 생사림에 들어가 그것을 확인하고자 문제를 야기(惹起)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운중선으로 옮기면 되오."

@BRI@이미 설중행은 여러 가지 생각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운중보가 아니다. 언제라도 숨어나갈 수 있다면 빠져나가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염병할…, 비가 와서 그런가…? 차 맛이 왜 이러지?"

능효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만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언제 할 거야?'


'항상 우리가 움직이는 그 시각에…!'

이미 생각해 놓은 대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성패 여부를 떠나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작정인 것이다. 능효봉이 탁자 위에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씨익 웃었다.


'일찍 자야겠군. 저녁에 술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생겼어. 쩝…!'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함정인지 알면서도 같이 움직이는 수밖에…. 그들이 움직이는 시각은 항상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각인, 그리고 경계를 서는 사람이면 가장 느슨해지기 쉬운 새벽이었다.

'고맙소.'

'고마울 것 없어. 네 놈이 잡히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때였다. 방문을 열고 시비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설중행을 보며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설공자께서 내일 들러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알리지 않았단 말이냐?"

능효봉이 화풀이 상대를 만났다는 듯 짐짓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하지만 시비 역시 녹록한 아이는 아니었다. 능효봉이 뭐라 해도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다시 설중행을 보고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가씨의 어머님께서 와 계신 관계로…."

그 순간 능효봉의 눈이 커지며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단철수화(丹鐵手花) 궁단령(宮丹令)께서 이곳에 와 계신단 말인가?"

약간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시비는 샐쭉 눈을 흘기며 능효봉을 보았다가는 마치 그것을 물은 사람이 설중행이나 된 듯 대답했다.

"오신지 채 한시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신 어른이시라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외인을 만나시지는 못할 것 같다는 전언이셨습니다."

삼합회(三合會)의 현 회주인 단철수화 궁단령이 온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면 오후에 들어오는 운중선으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허나 오후에는 아무도 마중 나가지 않았고,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철수화라면 보주는 몰라도 제자들은 모두 나가 맞이해야 할 정도의 대단한 여인이다. 헌데 왜 아무도 마중 나가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가 정식으로 온다는 통보를 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허나 운중선의 인물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저런 이유가 아니라면 연유야 어찌되었든 운중보에서 삼합회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눌 말씀이 많겠지. 내일 다시 들르겠다고 전하게."

설중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효봉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가만있다가 설중행이 일어나며 의자를 끄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따라 일어섰다. 그는 분명 단철수화 궁단령이 운중보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약간 이상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궁단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이 안 되었나? 배가 출출하군…."

"아직 한 군데 남았소."

바로 보주의 딸인 우슬을 말함이었다.


58

"진삼이……? 진삼이……!"

옥청량의 음성은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자신들이 뻔히 있는 자리에서 단지 천 한 겹 사이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당황하고 있는 것은 옥기룡이나 단혁도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고수들이 있는 상황에서 기척도 없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목격자가 죽은 것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끊이지 않고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도 간혹이라도 진삼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불찰이었다.

"큰 실수를 했다!"

그래도 경험이 노련한 옥청량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를 질끈질끈 씹어가며 엎드린 채 죽어있는 진삼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사인은…?"

이미 조심스럽게 진삼의 시신을 살피고 있던 단혁이 움직임을 멈추고 목덜미 바로 위 머리를 헤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빨간 점이 하나 찍힌 것 같았지만 불빛에 뭔가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비침이 분명했다.

"극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중독되면서 기도가 막히고 내장이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무서운 독입니다."

바닥에는 피가 홍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진삼의 오른손 쪽 바닥에 있는 피는 흘러나온 피가 아니었다. 옥청량이 대답없이 시선을 그 핏자국으로 던지자 단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죽기 전 글을 남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휘갈겨 쓴 것이라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옥청량이 그곳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他們…… 十……, 그들……? 열…?"

타문(他們)은 그들이란 의미다. 진삼이 그들이라고 지목할 사람은 누굴까?

"흉수들이 왔었군. 버젓이 이곳에 온 것이야…."

죽어가면서까지 진삼이 그들이라고 쓸 대상은 흉수밖에 없다.

"흉수들이 운중보 내에 있었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들이 열 명이나 된단 말씀입니까?"

단혁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분명 그들이라는 글자는 분명했다. 또 진삼이 죽어가면서 그들이라고 할 자들은 흉수뿐이다. 허나 그 뒤의 열십(十) 자는 무슨 뜻인가? 분명 살아남아 도망친 흉수는 두 명뿐이지 않은가?

"불쌍한 진삼은 죽어가면서도 제 임무를 충실히 했어…. 마지막 글자는 열 명을 의미하는 글자가 아니다. 그는 마지막 글자를 완성하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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