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1회

등록 2007.01.11 08:27수정 2007.01.1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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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굳은 듯 서 있던 옥기룡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역시 문맥상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했던 터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내려 그은 획이 약간 왼쪽으로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열십자는 분명히 아닙니다. 진삼은 아마 래(來)자를 쓰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BRI@그것이었다. '他們…來.' 그들이 왔다!

옥청량이 고개를 끄떡였다. 옥기룡의 생각은 자신의 생각과 같았다. 진삼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그들이 왔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쓸 수 있는 글자는 오직 세 글자뿐이었다.

"언제쯤으로 보이나?"

옥청량이 흘러내린 피를 손끝에 비비며 묻자 단혁이 대답했다.

"피가 응고된 정도로 보아 한 시진 전쯤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겠지? 한 시진 전이라…. 그 때 온 자들이 누구였지?"

"한 시진 전을 전후로 보면 화산파의 인물들과 소림의 각원선사(覺元禪師)가 왔습니다. 그 뒤에 함곡 일행이 들이닥쳤고 주인님의 시신을 조사했습니다. 그들이 나간 뒤 교두들이 왔었습니다. 곧 이어 무당파의 인물들도 왔었고…."


"됐다. 동창에서는 단 한명도 오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동창의 인물들은 지금 청룡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옥청량이 일어났다. 흉수들은 분명 동창의 비영조다. 이미 형인 옥청문는 비영조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내일이면 운중보로 들어올 터였다. 헌데 동창에서는 이곳에 들르지도 않았는데 유일한 목격자인 진삼은 죽으면서 흉수들이 이곳에 왔음을 알려주었다.

"흉수들이 동창의 비영조에 소속된 인물이 아니었나…?"

옥청량은 의혹이 가득 찬 음성으로 나직하게 뇌까렸다. 뭔가 이상했다. 흉수들이 운중보로 스며들었다면 분명 동창이 머무는 청룡각에 있어야 했다. 아귀가 잘 맞지 않았다.

"진삼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

단혁 역시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흉수들은 분명 왔다. 진삼이 살해된 것은 그들이 왔다는 명백히 반증이다. 다른 무리에 섞여 왔다는 것이지. 더욱 무서운 사실은 흉수들이 왔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진삼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진삼이 살해된 것은 목격자의 입을 막기 위함이다. 흉수들이 왔다는 사실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를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흉수들이 왔고, 그것을 본 진삼이 알리려하자 누군가가 진삼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삼을 죽인 누군가는 이미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또한 진삼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임도 아는 인물이었다. 흉수들과 한 패일 가능성뿐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을 터였다.

더욱 옥청량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진삼을 죽인 누군가는 이미 자신들의 움직임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은 흉수는 물론 그 관련자의 실마리도 찾지 못했는데, 상대는 자신들을 낱낱이 지켜보고 철저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과 승부를 하는 것이라면 백전백패다.

"…!"

옥청량은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위를 살폈다. 도대체 진삼을 살해한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서 지켜보다가 진삼을 살해한 것일까? 뒤쪽은 창문도 없는 벽이었다. 천정이나 대들보 등은 천의 높이가 낮아서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도 보였을 터였다.

"조사해 보게."

오히려 옥청량은 마음을 담담하게 가지려 노력했다. 지금 자신들이 흉수를 잡는다고 설칠 때가 아니었다. 진삼이 죽었음을 운중보에 알릴 수도 없었다. 이미 진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했다. 죽고 난 후에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말해봤자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옥청량은 단혁에게 명령을 하고는 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왼쪽에 죽은 듯이 쇠사슬로 묶여있는 자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이미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자였다.

"욱…!"

사내가 신음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며 낯빛이 썩은 돼지 간 색깔로 변해갔다.

"잘 들어둬…. 네 놈이 입을 열지 않아도 돼…. 생쥐처럼 도망친 네놈의 동료가 왔어…. 네 놈들은 알아보았겠지…. 이제 그들이 어떻게 할까? 네놈들을 이대로 두고 볼까? 아니지. 올게야…. 이곳으로 네놈들을 죽이러 오든, 구출해내기 위해 오든 반드시 오겠지…. 나는 이제 기다리면 돼. 이젠 네놈들이 살아있든 아니든 상관없어. 분명 네놈들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사내의 몸이 꿈틀거렸다. 이미 숨이 막혀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었다. 사실 이제는 죽여도 상관없었다. 숨이 막혀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옥청량은 더욱 차가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늘밤만 버티면 된다. 내일이면 형이 들어올 것이다. 비영조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고 흉수들의 정체도 알게 될 것이다. 더구나 흉수들이 비참한 동료들을 보았다면 분명 서둘러 구하러 올 터였다. 그것이 오늘밤이 될 확률이 높았다. 오늘, 여기서 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59

어차피 예상했던 대로 궁수유에게 문전박대를 받다시피 한 설중행과 능효봉에게 운무소축(雲霧小築)의 문은 의외로 너무나 쉽게 열렸고, 두 사람은 운무소축의 주인이자 운중보주의 딸인 우슬(于瑟)이란 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사실 아름다움의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무리에 섞여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또한 아름다움의 관점 역시 아주 다양한 색깔을 띤다. 여인마다 아름다움의 색깔은 각기 달라 흔히 요염하다든가, 청초하다든가, 농염하다는 등의 수식어로 한 여인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의 생각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고 느낀다. 여자의 미(美)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지만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를 표현할만한 단어는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낯선 두 사내를 위해 직접 차를 따라주는 일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웠다. 그리고 선뜻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우아함과 고귀함이 있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 어린 시비 하나와 한쪽 구석에 목상처럼 앉아있는 검은색 무복(武服) 차림의 차가운 여인만 없었더라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흑의무복 차림의 여인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저 목상 같았다. 얼굴 역시 칼로 깎은 듯 매끄럽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차가운 느낌만 아니라면 아주 시원스런 미녀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금방 날을 세운 날카로운 한 자루의 칼을 보는 느낌이었다.

"초목(草木)이 단비에 너무 기뻐하는군요."

조사를 하러 왔으면 무슨 말인가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와중에 우슬은 시선을 창가로 돌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아주 편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발했다. 어색한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잠시 숨을 돌리게 해주는 말이었지만 그 말 역시 선뜻 동조하기 어려운 다소 의외의 말이었다.

봄이 완연한데도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이번 비는 산천초목이나 농작물에 단비가 될 것임에는 분명했다. 허나 '초목에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초목이 너무 기뻐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슬이란 저 처자는 초목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거나, 아니면 초목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흐흠, 우리가 불쑥 이렇게 찾아 온 것은…."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 설중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 있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왠지 쉽게 말을 나누기 어려웠고, 그녀의 전신에서 흐르는 자태와 기품이 자신과는 물과 기름같이 영 섞이지 않을 것 같자 간단하게 용무를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알고 있어요. 소녀는 서향을 좋아해요."

운무소축의 주위에는 이미 수십 그루의 서향이 심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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