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억---! 쿨룩 --- 쿨룩---"
또 다시 능효봉이 사래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한참이나 쿨룩거리던 능효봉이 찻잔에 찻물을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엇 뜨거…."
찻물이 조금 뜨거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들이 두 명씩이나 끼어있는 자리에서 다시 뱉지도 못하고 억지로 꿀꺽 삼키고는 혀를 내둘렀다. 얼굴마저도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언제나 여유 있게 자신에게 쏘아진 화살을 피해 나가던 능효봉에게는 보기 드문 수난이었다.
"어째…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싫더니…, 술맛도 아주 최악이로군…."
그는 소매로 입가에 흐른 물기를 쓱 닦아내면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술 탓 하지마…. 그래도 보주께서 특별히 보내온 죽엽청(竹葉靑)이야…. 우리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겠지만…."
@BRI@풍철한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역시 함곡은 지나치게 똑똑한 친구였다. 능효봉의 태도로 보아 함곡이 예상하던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한편으로는 아주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조그만 실마리는 잡은 셈이었다.
"젠장…, 알겠소. 술이나 한 잔 더 마십시다. 우리 셋이 말이오."
능효봉이 술병을 들려하자 풍철한이 먼저 술병을 낚아채서 함곡과 자신의 잔에 따르고는 능효봉의 잔을 채웠다.
"솔직하게 대해주니 고맙군."
풍철한이 두 손으로 잔을 치켜들고 함곡과 능효봉에게 향했다. 풍철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이미 능효봉이 부정을 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 자신이 팔숙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존재조차도 불투명했던 팔숙이란 존재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함곡과 능효봉도 역시 마찬가지로 잔을 치켜들어 상대를 향해 한 번 들어올렸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마치 무슨 결의형제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소외된 나머지 사람들이 투정을 부릴 만했지만 지금 끼어들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팔숙이라니…? 그게 뭐죠?"
바로 혈녹접 소유향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계속 능효봉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사람… 아주 죽이려 작정했군. 이보쇼…."
능효봉이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소유향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의 눈초리가 기이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은 아주 이상해서 웃는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애매했다.
"간혹 소녀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작자들 중에는 술을 끊은 지 오래된 인간들이 많지요."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는 듯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살벌하게 느껴지는 미소가 될 수 있었다. 능효봉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 하지만 당신 입에서 농담처럼 나오는 그 말 한마디에 내 목숨이 위험해 지거든. 경고해 두지만 다시 그 말을 당신 입에 담는 순간 당신의 그 예쁜 입술과 혀는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될 거야."
능효봉의 시선이 비수처럼 소유향의 눈을 파고들었다. 일렁이는 그의 기세가 질식할 것 같은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소유향이 누구인가? 그 역시 중원 무림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강호사괴 중의 한 명이다. 그녀의 눈초리가 더욱더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의미다.
"이런…."
그녀의 입에서 싸늘한 말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반효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꾹 눌렀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목소리는 너무 침중하고 엄해서 소유향은 멈칫했다. 셋째 오빠의 입에서 자신을 꾸짖는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힐끗 풍철한을 보았는데, 풍철한 역시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외면은 하고 있지만 모두 못마땅한 표정이다. 이럴 때는 정말 나서면 안 된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능효봉을 노려보며 화를 삭였다.
하지만 능효봉의 말은 모두에게 한 경고였다. 만약 자신이 팔숙 중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날에는 어느 누구에게 당할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밝히기는 했지만, 또한 상황에 따라 각오한 일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 외에 알려지면 복잡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보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
풍철한이 소유향의 행동에 대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제나 뻔뻔스러움을 자랑으로 아는 풍철한으로서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 마음은 능효봉에게 전달되기 충분했다.
"까짓 것 이제 뭐는 대답 못하겠소? 그전에 술 한 잔 더 합시다. 이것은 제가 올리는 잔이오."
이미 마음을 터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능효봉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마음을 열기 어렵지 마음을 열면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할 만큼 활짝 열어 보인다. 능효봉이 술병을 들어 풍철한과 함곡의 잔에 따르고는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것은 두 번째 잔이오. 첫 잔은 풍형을 위한 잔이었으니 이 잔은 함곡 선생을 위한 잔으로 합시다."
두 손으로 받쳐 든 능효봉이 단숨에 마셔버리자 얼떨결에 술이 약한 함곡 역시 단숨에 마셨다. 풍철한이 잔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눈짓으로 설중행을 가리켰다.
"저놈은 대체 누구야?"
능효봉이 잔을 내려놓고는 풍철한의 질문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요? 저 친구가 누구인지는 풍형이 직접 저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 있는데 그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물으면 어쩌란 말인가? 허나 지금은 특이한 경우였다. 본인이 본인을 모르는 그러한 상황. 그러면서도 옆의 인물은 분명 그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 허나 능효봉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은 너무 자연스러워 풍철한이나 함곡마저도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자식…, 도대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나라고 뭐 더 많이 알 것 같아 그러는 거요? 하기야 벌써 구년을 넘게 봐왔으니 뭐 풍형보다야 내가 조금 더 알긴 알거요."
능효봉의 말에 풍철한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갑자기 함곡이 술병을 들더니 자신의 잔에 따르고 나서 풍철한과 능효봉의 잔에 마저 따랐다.
"자…, 이 잔은 능대협을 위한 잔이오. 그래도 삼배(三杯)는 해야 하지 않겠소?"
"허…, 함곡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은 처음 듣겠군."
풍철한이 별일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잔을 들었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미 함곡과 상의한 대로 한 가지 더 확인할 일이 남아있었고, 그것을 위해 함곡 역시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카아---- 술 맛 좋구려."
능효봉이 어느새 너스레를 떨자 풍철한이 핀잔을 던졌다.
"언제는 술 맛이 최악이라며…?"
"술이란 게 본래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거요. 점심 때 풍형도 독약 마시듯 술을 마셔놓고는…."
상만천과의 식사 때의 풍철한이 죽을 상을 하고 앉아있었던 것을 빗댄 말이었다.
"역시 눈치 하나만은 중원 제일이군. 여하튼 좋아…. 저 녀석이 아미의 화부 노릇을 했던 설(雪)씨란 촌노의 자식이고, 한 때 아미파의 추천을 받아 이 운중보에서 칠년 간 수학하다가 쫓겨났다는 것까지는 알아…. 허나 그것만으로는 지금 저 자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거든? 도대체 저 자식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거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설중행을 힐끗 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능효봉이 아니라면 설중행 본인도 대답해 보라는 눈치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