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7회

등록 2007.01.19 08:19수정 2007.01.1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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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효봉은 잠시 설중행을 주시하며 기다렸지만 설중행이 여전히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 대답할 기미가 없자 입을 열었다.

"낸들 뭐 더 아는 게 있겠소? 저 친구가 비영조에 몸을 담은 것은 구년 전이었소. 열넷의 나이로 운중보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삼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은 없소. 그 뒤로는 비영조에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 할만은 하오."


"그 간 자네가 돌봐주고 있었나?"

"뭐 아니라고 할 수도 없소. 동료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처음부터 저 친구가 마음에 들긴 했소. 동생 같은 생각도 들었고…."

@BRI@풍철한의 얼굴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아무리 보아도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을 열어도 그것만큼은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지? 내가 보기에 저 자식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정말 모르고 있어. 허나 자네는 분명 알거야…."

풍철한이 추궁하자 능효봉은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때였다.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훌쩍 마셔버린 설중행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리 중요한 거요? 내가 누구든…, 내가 어찌되었든…, 지금 따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에 있소? 그저 나는 나요.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얼굴에 숯 검뎅이 묻히고 산 설효(雪涍)라는 화부의 자식일 뿐이오. 아비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그 대가로 감히 꿈꾸지 못할 이 운중보에 들어와 수학하다가 그나마 버티지 못하고 쫓겨난 별 볼일 없는 놈이란 말이오."

그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자신의 신세에 대해 남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한 모습이었다. 사실 자신을 앞에 두고 남들이 말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설소협은 매우 중요하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소."

나선 사람은 함곡이었다. 그의 눈빛은 다른 때와 달리 매우 반짝이고 있었는데 매우 신중한 모습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설소협이 원하든 아니든 지금 이 운중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설소협과 관계가 있소. 설소협 뿐 아니라 우리들마저도 어리둥절할 정도요. 나는 적어도 설소협이 이 운중보 내의 상황을 풀어나갈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란 생각이 드오."

"풍대협은 물론 함곡 선생께서도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내가 무슨 능력이 있겠소? 더구나 내가 왜 연관되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연관이 된다고 생각해 자꾸 그런 쪽으로 몰고 가다 보니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니겠소? 도대체 이 운중보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어… 자꾸…."

"분명 관계가 있소. 아직 그 관계를 모를 뿐이오. 능대협은 아실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오. 하지만 나는 설소협이 이 운중보 내에 중요인물과 관계가 있고, 어쩌면 보주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렵소."

설중행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 역시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찾아간 우슬의 태도에서 그 역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능효봉에게 말했다.

"능형…, 도대체 능형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이오? 알고 있으면 속 시원히 말 좀 해보쇼."

신경질 내듯 말하는 설중행을 보며 능효봉은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 자식아…. 너도 너를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알아? 너까지 나에게 나에 대해 말하라면 어쩌란 말이야? 빌어먹을…. 네가 언제 나에게 네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 그저 전에 그랬소… 하는 식이었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하고 물으면 '전에 해본 적이 있소'라는 식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설중행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민망한 표정을 짓다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술잔에 따르고는 훌쩍 마셨다. 그러자 그가 잔을 놓기 무섭게 함곡이 술병을 들어 설중행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쨌든 좋소.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이 운중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결할 사람이 설공이오. 그래서 말인데…."

갑자기 칭호가 '소협'에서 '공(公)'으로 바뀌었다. 함곡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은근한 표정으로 풍철한을 쳐다보았다. 풍철한 역시 그 시선의 의미를 감지했는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잔을 치켜들었다.

"자…, 모두들 한 잔 들자구…. 이 친구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친구를 믿어 봐야지."

그러더니 왼손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용비를 들어 설중행에게 내밀었다. 현무각으로 돌아오자마자 설중행이 반납한 것을 받아 두었던 것인데, 다시 설중행에게 주는 것이다. 설중행이 무슨 뜻인지 눈을 치켜뜨며 망설이자 아예 풍철한은 슬쩍 던져 주었다.

"보주가 허락을 하건 말건 상관없어…. 지금부터 사흘간은 네 것이다…."

그러자 함곡 역시 옆에 놓아두었던 봉비를 설중행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받으시오. 이것이 이 친구와 상의해 내린 결정이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용봉쌍비를 자신에게 주는 것일까?

"네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으마. 물론 그것을 잘못 사용한 이후의 책임은 함곡과 내가 지겠지.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라 결론 내렸다."

용봉쌍비는 운중보주가 함곡과 풍철한에게 준 것이다. 그것을 설중행에게 건네주는 것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을 설중행이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함곡과 풍철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무슨 뜻이오?"

설중행이 갑작스런 두 사람의 행동에 놀란 듯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능효봉까지도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함곡과 풍철한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함곡이 잔을 치켜들었다. 같이 마시자는 의미. 풍철한이 잔을 들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모두 잔을 추켜올렸다. 함곡이 대답했다.

"이제 우리 일행의 수장(首長)은 설공이오. 우리가 이 운중보에 있는 동안은 말이오. 우리는 설공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이고 그 책임은 우리 모두가 지게 될 것이오."

그러더니 잔을 두어 번 좌우로 추켜올린 후에 잔을 단숨에 비었다. 그와 함께 의혹스런 표정을 떠올리며 일행들도 일단 같이 잔을 비웠다.

"이 중에서 지금 우리의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시오. 강요하지 않겠소."

이미 결정해 놓고는 선택하란 말이다.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요였다. 선화는 함곡의 동생이니 반대할 리 없다. 또 반효나 천방지축이라고는 하나 소유향이 풍철한의 결정을 무시하고 반대할 리는 없는 노릇. 결국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인물은 능효봉 뿐이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저 자식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거로군."

능효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을 훌쩍 비우고는 투덜거렸다. 결정된 것이다.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함곡과 풍철한은 용봉쌍비를 설중행에게 넘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것은 능효봉의 말대로 목숨을 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에 운중보 내 또 다른 여러 곳에서도 크고 작은 결정이 이루어지고 분주한 밀담이 오고 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움직이는 인물들은 없었다. 지금은 행동으로 옮길 때가 아니라 우선 피아(彼我)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틀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음습한 음모의 냄새를 짙게 풍기면서….

그리고 본격적인 움직임은 이틀째 되는 밤이 아니라 자정이 넘은 사흘째 자시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제 2권이 끝났습니다. 이틀째 이야기에서 미진한 부분은 있지만 2권의 양이 늘어나다보니 여기서 2권을 끝내야 하겟습니다. 3권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겠군요. 애독해 주시는 독자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제 2권이 끝났습니다. 이틀째 이야기에서 미진한 부분은 있지만 2권의 양이 늘어나다보니 여기서 2권을 끝내야 하겟습니다. 3권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겠군요. 애독해 주시는 독자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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