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있다

[태종 이방원 37]혁명전야 2

등록 2007.02.05 08:15수정 2007.02.0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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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회의에서 아무리 대책을 논의해도 대책이 없는 것이 고민이었다. 방원은 정몽주를 죽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는 이로 맞대응하며 속전속결을 주장하는 방원의 생각에 이성계는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정몽주를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미에 제 성깔을 참지 못한 방원이 방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라 이제와 이화가 뛰어나왔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비라도 한줄기 뿌릴 듯하다. 정원을 서성이며 방책을 강구했으나 대안이 없었다.


"아버님께서 반대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래도 반드시 처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없애버리고 사후에 말씀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숨을 고르며 구수회의를 마친 방원은 다시 이성계와 마주 앉았다.

"지금 몽주가 사람을 보내어 도전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태조실록>

정몽주를 죽이도록 허락해 달라는 끈질긴 요구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너는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 -<태조실록>


아버지 이성계의 명이다. 정몽주를 죽이라는 허락은커녕 어머니 산소 곁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다.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방원은 절망했다. 닥쳐올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왔다. 숭교리에 남아서 아버지 병환을 시중들게 해달라고 재차 간청했으나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 방원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제의 송악산은 오늘의 송악산이 아니었다


숭교리 이성계의 사저를 빠져나온 방원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추동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방원은 사랑채에 앉아 송악산을 바라보았다. 구름에 가렸던 정상이 바람에 밀려 모습을 드러냈다. 황주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봤던 송악산은 분명 지금의 산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세상이 변했을까? 산이 변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변했을까? 그때 봤던 산이 분명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달라보였다. '저 산을 다시는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개경을 떠나 어머니 한씨의 묘소가 있는 속촌(粟村)으로 돌아가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해도 된다'라고 맹자님이 가르침을 주셨는데 덕을 잃었다는 척도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尺)가 올바른 자인가?"

방원은 이제 칼을 빼면 정몽주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고려가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몽주의 보호막 뒤에 있는 공양왕도 자연인 한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500년을 면면히 이어온 고려라는 국체가 문제라는 것을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혁명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고려가 무너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인이 물을 열어주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사람은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병조좌랑을 거치며 무골 기질을 몸에 익힌 인물이었다. 정탁은 사랑채에 들어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작태가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여막도 중요하지만 개경이 더 중요합니다. 가시면 아니 됩니다. 몽주를 쳐야 합니다." -<태조실록>

흥분된 정탁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유배지에서 감옥으로 이송된 정도전, 목숨이 위태롭다

한편, 9년 전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정도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김진양의 탄핵으로 정도전은 경북 봉화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생활도 잠시, 개경에서 내려온 순군옥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보주(예천)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

유배지에서 감옥으로 이송된 것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개경을 떠나 올 때 사냥하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성계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장군이 죽었단 말인가?"

이성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개경의 정국 기상도를 모르고 있는 정도전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옥졸들에게 귀동냥을 해보았지만 퉁명스러운 답변이 돌아올 뿐 뾰쪽한 소식이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개경에서 내려온 순군옥 관리들은 정도전을 거칠게 다뤘다. 벼슬이 정2품 정당문학 이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배후에는 정몽주가 있는 것 같았다. 국문(鞠問)에 버금가는 심문의 농도로 보아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인임의 미움을 사 나주로 유배 갔을 때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다.

"사나이 대장부가 나라에 대한 한을 품고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나라는 고려가 아니라 '새나라'다.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 '새나라를 건설하자'고 굳게 맹약한 이후 '새나라'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원은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대륙은 넓고 반도는 좁더라"고 인식했지만 정도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륙은 넓다. 땅 덩어리가 큰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땅 덩어리가 좁지만 큰 정치를 펼치면 큰 나라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정도전의 신념이었다. 비록 땅 덩어리는 작지만 큰 정치를 펼치면 큰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훗날 펼치려 했던 민본사상(民本思想)이다. 백성에 바탕을 두고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백성들로부터 큰 동인(動因)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힘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큰 나라 이상의 자산이라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인명은 재천이라 생각하며 감옥살이 틈틈이 자신의 학문을 가다듬었다. 왕권의 일방적인 다스림은 통치다. 통치란 그 속성상 아래로 내려갈수록 압박이 강해져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끝내는 압력이 폭발하여 왕권을 위협 한다. 폭발은 군주와 백성 모두에게 불행이다. 이러한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정치다. 무게중심도 신권 쪽에 있어야 한다. 라고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얻어진 정도전의 사상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이 있으니 조선실록이다. 자료의 보고라는 조선실록 이전의 자료에 지치(至治)나 통치(統治)라는 낱말을 흔하게 접할 수 있으나 정치라는 낱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로소 정도전시대 이후에 정치(政治)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정도전은 나주에서 유배생활 할 때 ‘새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면 예천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감옥살이 하면서 정치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감옥과 유배가 좋은 연구의 장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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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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