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넘어선 아들, 혁명의 깃발을 들다

[태종 이방원 38] 혁명전야 3

등록 2007.02.06 11:00수정 2007.02.0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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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방문객 정탁을 맞이한 방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달음에 숭교리 이성계 사저에 들이닥쳤다. 몸을 다친 이성계는 병상에 누워있고 사랑채에서는 이화와 이제가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고 있었다. 사랑채에 들어선 방원은 이제와 이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어도 속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몽주를 치기로 결심했다."


결심포고였다. 좌중을 휘둘러보는 방원의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방원은 이대로 어머니의 묘소 곁으로 돌아간다면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찬성합니다."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

이제와 이화는 이구동성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행동대장으로 누가 나서는 게 좋겠는가?"
"이지란 장군이 적임자입니다."

이지란은 고려로 귀화한 여진족 무장이다. 이성계가 동북면에 있을 때 이성계의 용맹에 감복하여 휘하의 장졸들을 이끌고 투항하여 이성계의 수하가 된 사람이다. 이성계를 도와 거란족 소탕작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성계와 호형호제하며 이성계 진영을 떠나지 않은 의리파 무골이었다.


"이지란 장군이 나서 주셔야 하겠습니다."

방원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지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청했다.


"우리 장군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이지란은 난색을 표명했다. 이성계의 하명 없는 행동은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방원은 절벽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좌중을 휘둘러본 방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휘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태조실록>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방안의 공기가 숙연함마저 감돌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방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씨(李氏)가 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이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 뒤집어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태조실록>

호랑이가 포효 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아버지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다"고 말하지만 방원은 명을 만들어 가겠다는 태도다.

핏줄을 벗어나지 못했던 방원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조선실록에서 인용한 방원의 얘기에 미지의 국체는 없고 이씨(李氏)라는 혈족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순간 방원은 '새나라'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 없이 자신과 아버지의 목을 죄어오는 위해 세력의 중심인물로 정몽주를 지목하고 그를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경륜의 차이일까? 사유의 폭의 차이일까? 방원에게 정몽주는 핏줄을 보호하기 위한 장애물이었지만 정도전으로부터 '새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넘겨받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끌어안고 가야 하는 인물이었다. 방원은 이성계의 아들로서 핏줄에 충실하려 들었고 이성계는 '새나라'라는 큰 그림에서 정몽주를 대하고 있었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조선을 침탈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에게 '조선(朝鮮)'을 '이씨조선(李氏朝鮮)'과 더 나아가서 '이왕가(李王家)'라 폄훼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주자 않았나 하는 점이다.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유교국가 조선(朝鮮)을 깎아 내리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하여 조선실록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이씨(李氏)라는 문구는 눈을 번쩍 뜨이게 했을 것이다.

"감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침묵을 깨고 조영규가 개연(慨然)히 말했다.

"좋다. 조영규가 책임을 맡고 고여, 조영무, 이부는 지금 즉시 도당(都堂-도평의사사)으로 쳐들어가 몽주의 목을 베어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인간 방원이 혁명가 이방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제까지는 아버지 이성계가 모든 것을 주관했다. 위화도 회군과 최영장군 처형 그리고 우왕과 창왕을 퇴출하는 일은 이성계의 영역이었다. 침범할 수 없는 장군의 권한이었다. 감히 범할 수 없는 아버지의 권위였다.

헌데, 정몽주를 죽이라는 명은 이성계를 제쳐두고 방원이 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성계의 정보참모로 충실했지만 이제부터는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된 것이다. 약관을 갓 넘긴 20대의 젊은이가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대들보 정몽주가 죽으면 고려가 무너진다는 것은 명역관화 했다. 이성계는 임금의 명을 빌려 집행했고 최소한의 질서와 순리를 따르려 노력했다. 방원의 명에는 국법도 없다. 위계질서도 무시했다. 군사를 움직일 병권도 없다. 그렇지만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노라고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가히 혁명적 상황이다.

방원의 명령은 폭력이다. 혁명은 폭력을 수반한다. 폭력이 정당화 되었을 때 혁명이 된다. 이 폭력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부당함으로 인하여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인지?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피끓는 젊은이가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선봉에 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라면 방원이 혁명의 깃발을 치켜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거시적인 안목

여기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방원은 25세 젊은이다. 직책은 정2품 밀직대언(密直代言) 이다. 현대적 의미로 풀이하면 사정기관의 차관급 관리다. 25세에 고위관리라? 좀 이상해 보인다. 물론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으로 고속승진 했겠지만 나이에 비해 과하다. 여기에 이성계의 숨은 뜻이 있다.

이성계는 방원의 저돌성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치고 나가는 방원의 추진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정2품이라는 관직이지 않느냐 하는 해석이다. 이성계의 특급참모 정도전은 방원과 품계가 같은 정당문학이지만 나이가 방원보다 30세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도 어리고 관직도 낮았을 때 정도전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하고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그밖에 이성계를 따르는 무장들도 방원보다 훨씬 연배가 높다. 이러한 서열과 위계질서를 깰 수 있는 무기가 정2품 관직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리를 지휘할 수 있는 무기가 직급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방원의 저돌성에 동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이에 비하면 과한 직급에 올려놨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몽주를 죽이라"는 역사를 가르는 방원의 명이 떨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 같았다. 조영규와 고여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있었으니 정보와 첩보였다.

숭교리 이성계 사저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이원계의 사위 변중량이 탄 말이 선죽교를 건너 정몽주의 집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정보 수집가와 첩보 염탐자는 있게 마련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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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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