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임금 모신 송악산,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태종 이방원 43] 대장군 이성계, 왕위에 오르다

등록 2007.02.16 16:35수정 2007.02.1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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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멸하고 외세를 빌어 통일할 것이다

송악산은 개경의 상징이며 고려의 혼(魂)이다. 송악산은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과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산의 정기가 마식령산맥을 넘으며 성거산과 정분을 나누다 천마산을 낳고 오관산을 품어 송악을 낳았기 때문이다.


@BRI@일찍이 외세를 빌리지 않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했다. 신라처럼 외세를 빌리지 않고 한반도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새나라'의 도읍지를 물색하던 왕건은 송악산에 주목했다. 견훤과 궁예, 신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영웅호걸들과 자웅을 겨뤄 패권을 장악한 왕건의 주 활동 무대는 임강(臨江) 이남이었다.

새로운 도읍지는 임강 이남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경을 낙점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이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 설(說)과 함께 임강 이남에 수도를 정하는 왕조는 외세에 멸하고 외세에 의하여 통일 된다는 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흉설(凶說)을 피하기 위하여 선택한 곳이 개경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 하지만 송악산은 두 왕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건의 염려처럼 외세에 의하여 새 왕조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야 할까? 치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튼 송악산은 두 왕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갈채 없는 군주

1393년 7월17일. 새 왕조가 탄생했다. 고려의 대장군 이성계가 신생국 왕으로 변신하는 날이다. 부패한 고려를 뒤엎은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 나라를 '조선'이라 부르지만 이 순간 국명이 유보된 신생국이었다.


5백년 도읍지 개경이 술렁거렸다. 새 왕조를 축하하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개경인들은 냉담했다. 오히려 혁명에 희생된 최영 장군과 정몽주를 흠모하는 정서였다. 한마디로 백성들의 갈채 없는 왕조가 출범한 것이다.

태조 왕건이 송악산 아래 도읍을 정하고 도읍지로서 시혜를 많이 받아서일까? 개경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최영 장군과 정몽주가 희생된 데 대한 정신적인 공항일까? 개경인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패망한 고려 마지막 임금의 눈물

즉위식이 있기 닷새 전.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왕대비를 찾아가 공양왕을 폐 할 것이니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거부할 힘이 없는 왕대비로부터 윤허를 받아낸 배극렴은 지체 없이 시행하라고 명했다. 명을 받든 남은(南誾)과 정희계(鄭熙啓)가 북천동 시좌궁(時坐宮)에 연금돼있던 공양왕을 찾아가 교지를 선포하니 부복하여 받들었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소.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흐느끼다 멈추고 끊어졌다 이어지며 말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한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전국새(傳國璽)를 받아든 남은 일행은 대비전으로 향하고 공양왕은 유배 길에 올랐다. 이것이 태조 왕건이 창건하여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왕조 마지막 임금의 모습이다.

권력을 쫓아가는 해바라기들의 축제

즉위 하루 전. 16일에는 전야제가 열렸다. 배극렴을 필두로 고여, 김균, 김노, 김사형, 김인찬, 남은, 남재, 민여익, 박포, 손흥종, 심효생, 안경공, 오몽을, 오사충, 유경, 유원정, 윤호, 이근, 이민도, 이백유, 이부, 이서, 이지란, 이직, 이제, 이화, 임언충, 장사길, 장사정, 장지화, 정담, 정도전, 정용수, 정총, 정탁, 정희계, 조견, 조기, 조박, 조반, 조영규, 조영무, 조온, 조인옥, 조준, 한상경, 함부림, 황거정, 홍길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몰려갔다.

개경에는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는 숭인문에서 서대문격인 선의문에 이르는 길이다. 또한 송악산에서 회빈문으로 종단하는 도로가 있다. 그 십자로 왼쪽에 있는 것이 수창궁이다. 수창궁에서 선죽교를 건너 숭인문 쪽으로 가면 이성계의 집이 있다. 훗날 목청전이라 부르게 된 숭교리 사저다.

국새를 받든 일행이 저택 어귀에 나아가니 사람들로 골목에 꽉 메워 있었다. 개경 사람들이 다 나온 듯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개경은 4820호의 주택에 인구는 8370명 군졸이 1000여명 주둔하고 있었으니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1만 명 정도의 도읍지였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기는 백성들도 많았다. 어느 시대 어느 혁명을 막론하고 찬성하는 이가 있는 가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새 왕조를 반기는 무리가 있었으니 기층민이었다.

왕위에 어서 빨리 오르시오

가진 것 없어 있는 자에게 수탈당하고 배운 것 없어 고관 나리들에게 기죽어 지내던 백성들은 대환영이었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이들을 고무시켰다. 토지는 사찰과 고관대작들이 소유하고 자신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소작농이었으니 이들의 소망은 한 평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는 것이었다. 배극렴이하 문무백관이 엎드려 간청하였다.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이성계는 거절했다. 통과의례였다. 이성계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부복하여 재차 간청했다. 이성계는 사양했다. 절차의례였으리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따르는 무장들과 고려 조정의 녹을 먹던 문신들이 둘러싸고 물러가지 않았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등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권고하니 이날에 이르러 이성계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德)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이성계의 왕위 수락이다. 즉위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등극한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도록 명령했다. 즉위식을 마친 이성계는 궁에서 유숙하지 않고 사저로 돌아왔다. 수창궁에서 숭교리로 돌아오는 길에는 선죽교가 있다. 그 선죽교에 정몽주의 피가 채 마르지 않아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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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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