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8회

등록 2007.02.22 08:12수정 2007.02.2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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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 터였다. 그것이 비록 가지지 못한 자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의 변명이 될지라도 말이다.

"할 일이 왜 없겠소? 이 자식부터 봐 주시오."


능효봉은 다시 예의 장난스런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귀산노인과의 잊혀질 듯한 약속에 대한 정리가 끝났다. 그러자 갑자기 안고 있던 설중행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능효봉은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침상으로 다가가 설중행을 뉘였다.

"결국 미친 짓을 했군. 이 녀석만 당한거야? 네 놈은 상관없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나는 애초에 백호각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소. 이 자식이 당하는 순간 그냥 뛰어들어 빼내온 거요."

"용케 빠져나왔군. 따라 붙었을 텐데…"


"도망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소. 그 자들이 아니라 일접사충 중 복이란 년이 따라 붙어서 애는 먹었지만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소."

"누구에게 당한 거야?"


"옥기룡에게 당했소. 아마 혈간의 선인천간(仙人天竿) 중 홍예금룡(虹霓擒龍)이란 초식이었던 것 같은데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있소."

능효봉은 말을 하면서 젖어있는 설중행의 상의를 벗겨냈다.

"외상은 전혀 없는데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 같소. 이 자식 그런 정도에 혼수상태에 빠질 만큼 약한 녀석은 아닌데"

능효봉의 시선이 설중행의 불룩 솟은 명치부위를 보고 있었다. 충혈 된 듯 붉으레하게 솟아있는 설중행의 명치부위는 내상을 입은 것이라 보기에도 이상했다. 그것은 혈맥이 막혔을 때 보이는 아주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저 녀석도 이곳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할 놈이었는데…."

귀산노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설중행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귀산노인의 시선은 설중행에 가 있지 않고 오히려 능효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하자는 거야? 이 녀석이 누군지 몰라 이러는 것은 아닐 테고…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네 놈이 해야 할 일 아니야? 알량한 동료의식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그러자 능효봉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몰라서 묻소? 완전하게 빚을 받으려면 받은 것을 먼저 돌려주어야 하는 법이오."

"전제조건이란 말이냐?"

"아마 그 말이 적당할 듯 싶소. 하여간…."

능효봉은 조심스레 설중행의 상세를 살펴보다가 설중행을 뒤집었다.

"도와주지 않으려면 말이나 시키지 마시오. 방해되니까…."

설중행의 뒷목 위쪽 부위에도 역시 둥그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혈맥이 막혀 혈행이 원활치 않다는 증거였고, 두 부분에 피가 고여 터질 듯 팽창해 있다는 증거였다.

"빌어먹을… 이 자식 못 먹을 걸 먹었나? 아니면 옥기룡 그 자식이 암수를 쓴 거야?"

파파팍----!

능효봉의 손이 바르게 움직이며 설중행의 등에 있는 혈도 다섯 군데를 짚었다. 그리고는 다시 뒤집어 가슴과 배 부위의 혈도를 일곱 군데나 짚고 나서는 설중행의 상체를 일으켰다.

"뭐하려는 짓이야?"

유심히 옆에서 설중행의 상세를 지켜보던 귀산노인이 설중행을 일으키려는 능효봉을 제지했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일단 혈맥부터 타통 시켜야 하지 않겠소?"

아마 설중행의 배심혈(背心穴)에 자신의 장심을 대고 진기를 주입시켜 막혀있는 혈맥을 뚫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방법은 혈맥이 막혀있을 때나 기가 허할 때 아주 유용한 응급조치였다.

"정말 그건가? 어떻게 된 일이지? 일단 다시 뉘여 놔봐."

귀산노인은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며 의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능효봉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설중행에게 다가들어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추숙은 녀석이 왜 이 지경인지 아시는 거요?"

능효봉은 설중행을 다시 뉘여 놓고는 물었다. 뭔가 확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으음…."

귀산노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러더니 불쑥 말을 뱉었다.

"중의… 그 작자 솜씨야… 그 작자가 이 녀석의 몸에 금제를 가해놓았던 거야."

"무슨… 어떻게 중의가 이 녀석에게 금제를…?"

그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중의가 왜 이 자식에게 금제를 가한 것일까? 또한 그럴 만한 시간이 있었단 말인가? 무림인에게, 더구나 자신이 아는 한 설중행 같은 고수에게 금제를 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예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금제를 가하는 일이었다.

금제란 그 당시에는 두드러진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금제를 가하려는 자가 그어놓은 한계에 다다를 때만 일정한 제약이 가해지며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금제를 가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체질이나 무공수위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그가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혈맥의 운용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까지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그것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상대방의 체질이나 무공수위를 단번에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중의가 이 자식에게 금제를 가했다면 이 자식이 충분한 시간 동안 '나 죽여줍쇼' 하고 가만히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럴 만한 시간은 없었고, 이 자식이 이런 현상을 보인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로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운중보에 들어와 금제를 당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럴 만한 시간이 설중행에게 주어진 때는 없었다.

"그럼…?"

그 순간이었다. 능효봉의 뇌리 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하나의 영상이 있었다. 바로 중의가 운중보에 처음 들어올 때 당황하며 보여주었던 풍철한의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그럼 대체 어찌된 일이지? 이거 완전히 귀신에 홀린 것 같군. 이 자식아… 사흘 전 네 놈 상처를 치료해 준 의원이 바로 저 중의노인네란 말이야…--

그것이었다. 중의가 손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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