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9회

등록 2007.02.23 08:30수정 2007.02.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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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가 갑자기 돌팔이 행세를 하며 나타나 설중행의 상세를 치료해 주었다는 말을 들을 때 이상하기는 했다. 자신도 중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고.

“신기한 것은 이 녀석 역시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던 모양이군. 진력을 끌어올리다 급히 흩으러 버린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은 숨 쉬고 있지 못했을 게야.”

@BRI@귀산노인의 말은 능효봉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왜 중의가 이 자식에게 금제를 가해놓은 것일까? 결국 중의는 이미 이 자식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네 놈 역시 하마터면 이 녀석을 죽일 뻔 했어. 무리하게 진기를 주입해 혈맥을 뚫으려 했다면 혈맥이 파열돼 그 자리에서 즉사할 뻔 했지.”

“중의가 손을 썼다는 것이 확실하오?”

“오래 전에 이런 것과 비슷한 증세를 본 적이 있어. 네 놈과 같이 진기를 주입해 혈맥을 타통 시키려다 그 자리에서 혈맥이 파열되면서 피를 토하고 즉사했지. 나중에야 비로소 중의가 금제를 가해놓은 사실을 밝혀냈어.”

“그럼 중의도 이 녀석이 누군지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귀산노인이 설중행의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대충은… 확실한 연관 고리를 찾지 못해 결정적인 확신은 가질 수 없었지만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다고 들었다. 벌써 이삼년 전부터 네놈의 존재까지 어렴풋이 알아냈던 것도 같고… 지금까지 네 녀석 둘이 그들의 이목을 피하고 무사한 것이 신기할 정도야. 더구나 이곳까지 무사히 들어온 것은 기적이라 할 만 하지. 그래서 우연을 가장해 풍철한을 이용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

“나까지?”


그러고 보니 어제 상만천이 보여주었던 애매한 태도가 떠올랐다. 설중행과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제야 감이 잡히는 듯싶었다. 그러자 갑자기 상만천이 정말 심계가 깊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어떻게 자신들이 누군지 눈치 채고 있었으면서 끌어안을 생각을 했을까?

‘그 자는 소문처럼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소문처럼 상만천은 지칠 줄 모르는 정열과 원대한 야심을 가진 인물일지 몰랐다.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인물이라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늘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세간의 평가는 확실히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안돼… 중의 그 작자가 가해놓은 금제는 아무도 풀 수 없어.”

이리저리 방도를 강구하며 처치를 하다가 귀산노인이 설중행의 몸에서 손을 뗐다.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다른 방도는 없소?”

“없어. 있다면 오직 중의뿐이지.”

말투는 단호했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다.

“보주라면?”

“보주라고 해서 별 수 있을까? 이 녀석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금제를 가한 것이면 그 이유가 무얼까? 목적은 보주를 겨냥한 거야. 그렇다면 보주가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금제를 가해 놓았을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녀석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중의가 보주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 녀석에게 금제를 가했단 말이오?”

“중의는 정말 내심을 알 수 없는 자야. 모든 일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지. 마치 폭풍의 핵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야.”

폭풍의 핵 안은 오히려 고용하다. 그 안에 들어 있으면 폭풍에 휘말리지 않는다. 자신은 흔들리지 않으며 소용돌이치는 폭풍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의 상태가 정말 안 좋소.”

“다행히 결정적인 순간에 이 녀석 스스로 진기를 거두어 불행스런 일은 피했지만 앞으로 다섯 시진 이상은 힘들어. 혈맥이 막혀 한곳에 고여 있게 되면 농(膿)이 생기고 그 농이 혈맥을 따라 퍼지게 되면 그만이지. 온 몸이 부어오르고 고열에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 때라면 중의도 힘들어.”

“그 안에 중의에게 데려가야겠구려.”

“쓸데없는 생각 마. 네가 한 짓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능효봉의 말에 귀산노인이 못 박듯 말했다.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단호한 어조였다.

“너는 이제부터 이 녀석에게서 손 떼도록 해. 내가 보주에게 데려다 줄 테니. 중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보주라면 방법을 찾아내겠지. 중의에게 부탁을 하든지. 아니라도 보주의 능력이라면 최소한 목숨은 연장시킬 수 있을 거야.”

“내가 진 빚을 갚지 말라는 말이오?”

“지금까지 네가 한 것으로 이미 충분히 갚았어. 그것에 대해서는 보주도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추산노인의 얼굴에는 능효봉이 다른 짓을 할까봐 걱정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길은 이미 마련해 두었다. 본래는 만약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단지 네가 빚을 받아내는 것으로 모든 은원을 마무리한다고 하니 잘한 일인 것 같구나.”

“운중선이 아닌 쥐구멍이라도 파놓으신 게요?”

“너는 이 운중보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누군지 잊은 모양이구나?”

그제야 능효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운중보를 설계하고 만든 인물은 바로 귀산노인이었다. 산술(算術)은 물론 기관지학(機關之學), 성복지학(星卜之學) 등에 정통한 그였다.

“나는 모든 전각마다 두세 가지 장난을 쳐 놓았다. 윤석진의 거처에서 네 놈들이 발견한 침실 뒤 통로도 그것 중 하나이지. 그런 것들이 수없이 많아. 전각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발견해 자신만이 아는 곳이라 생각하고 은밀하게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곳이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말하는 귀산노인의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은 은근한 자부심이 떠올랐다.

“더구나 몇 군데만 손을 보면 운중보 전체를 죽음의 절진(絶陣)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고, 깡그리 무너뜨려 버릴 수도 있다.”

“손을 쓰기 전에 추숙부터 당하고 말거요. 이 안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기관지학에 문외한이겠소? 물론 추숙만은 못하겠지만 그 정도 알아본 인물들은 꽤 있을 거요.”

“녀석…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구나. 걱정마라. 지금까지 내가 놀고만 있었겠느냐? 그 정도 움직일만한 아이들은 있다.”

귀산노인은 능효봉의 마음을 넌지시 떠 보며 충동질하고 있다. 한 순간에 운중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유혹은 확실히 능효봉의 마음을 흔들기에 족했다. 하지만 능효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관두시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접었소.”

능효봉의 말에 귀산노인은 입맛을 다셨다. 능효봉은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운중보의 몰락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어차피 운중보를 무너뜨린다 해도 무림에 큰 충격과 파장만 던질 뿐 얻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귀산노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귀산노인으로서는 능효봉이 올 때를 기다려 모든 준비를 해놓았을 뿐이었다. 능효봉이 하고자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을 뿐이었다. 이제 그 모든 준비가 준비로서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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