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1회

등록 2007.02.27 08:20수정 2007.02.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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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소축은 조용했다. 운무소축은 금남(禁男)의 구역이었다. 특히 야간에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아마 흉수들이 운무소축으로 스며들었다면 무화(武花)가 그냥 보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일각 동안 근처에서 운무소축을 주시하며 청각을 최대한 높여 안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BRI@옥기룡은 발걸음을 생사림 쪽으로 돌렸다. 운무소축에서 일각이란 시각을 허비하고도 느긋하게 움직인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생사림은 소문대로 절진(絶陣)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의 사부는 죽은 아내와 아이가 고요하게 지내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부가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낄 때 조용히 죽은 아내와 아이의 영혼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사부가 귀산노인의 작품이라고 말해주었던 이 진식은 그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과 사부의 딸인 우슬 정도가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진식은 매우 어렵고 난해하여 한번 빠져들면 진식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쉽게 벗어나기 어려웠다.

흉수가 타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쪽으로 왔다면 꽤 현명한 선택이라 하겠지만 지금쯤 진식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뱅뱅 돌 터였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곤경에 바질 것이고 결국 기진맥진해 널브러진 채 발견될 것이었다. 흉수가 이곳으로 도망쳤다면 그리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생사림 쪽에는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고 옅은 안개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뒷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에 접어들다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주욱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행벽합진(五行璧合陣)이라고 불리는 이 진식은 오행의 변화를 기본으로 만든 진인데 시각마다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변화하는데 그 무서움이 있었다. 따라서 오행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도 쉽게 그 출구를 찾을 수 없고, 한번 갇히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 이 진이었다.


그래도 오행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최소한 지쳐 쓰러지지는 않을 터였다. 생문을 찾지 못하더라도 운 좋게 휴문(休門)이라도 찾아낸다면 시각의 변화에 따라 생문을 찾을 수 있는 묘한 진이었다. 진식의 목적이 살상(殺傷)에 있지 않고 다시 되돌아 나가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사림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감지했다. 아주 미세한 것이었지만 분명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조용하게 진식의 움직임을 읽으며 그쪽으로 향했다.


“……!”

그러다 문득 그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나무 뒤로 숨겼다. 옅은 안개 속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있었고, 그 인물은 옥기룡의 눈에 아주 익은 얼굴이었다.

‘사형!“

안개 속에서 아주 느릿하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보주의 대제자인 잠룡검 장문위였다. 이토록 이른 새벽에 장문위는 무엇하러 생사림 안에 있는 것일까? 옥기룡은 장문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챘다.

무의식중에 옷깃을 여밀 만큼 쌀쌀한 새벽공기 속에서 장문위는 웃통을 벗고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근육이 적당하게 붙은 장문위의 상체는 군살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본래 체격이 큰 장문위의 몸은 사내가 보아도 반할 정도였다.

‘만천성우(滿天星雨)인가?’

만천성우(滿天星雨)는 사부의 독문비기로 제자 다섯에게 모두 전수한 세 가지 무공 중 하나였다. 심공인 단원심공(丹元心功)과 검법인 심인검(心印劍)이 그것이었는데, 만천성우는 아주 특이한 무공이었다.

수(手), 장(掌), 지(指), 권(拳), 각(脚) 등 사람의 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신체부위를 사용해 펼칠 수 있는 무공으로 일종의 박투술(搏鬪術)이라 해도 무방했다. 아주 실전적인 무공으로 어찌 보면 시정잡배들의 싸움기술과도 같아 제자들은 처음에 배울 때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옥기룡 역시 처음에는 천하제일인인 사부가 기껏 싸움꾼들이나 익히는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내심 불만스러워 하기도 했던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진가를 알고 난 다음에는 그 무엇보다 뛰어난 무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익히면 익힐수록 실전적으로 얼마나 유용한 무공인지 새록새록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만천성우는 실전감각을 익히고 유지하는데 가장 좋은 무공이었다. 무공은 멋이 아니었고, 화려하다는 것이 고절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익혔더라도 실전에서 어떻게 응용하느냐가 승부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왜 만천성우가 다른 그 무엇보다 필요한 무공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엄격하게 형(形)과 격(格)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익힌 어느 무공과도 조화가 가능했다. 가문의 독문무공이나 타파의 무공 역시 만천성우에 융화가 가능했고, 그 무공의 묘용을 십분 살려 실전적으로 더욱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만천성우였다.

"……!"

그런데 연무하고 있는 사형을 바라보고 있는 옥기룡의 눈에 당혹스런 빛이 어른거렸다.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지금 사형은 분명 만천성우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헌데 사형의 몸놀림은 너무나 느렸다. 아니 느린 정도가 아니라 언뜻 보면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주먹을 내뻗는 아주 간단한 동작 하나도 일각은 걸리는 것 같았다.

‘이정제동(以靜制動)! 사형은 벌써 그 경지에 오른 것인가?’

놀라움은 컸다. 사형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천력(天力)을 타고난 인물로 사형을 평가했다. 힘으로는 사형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들 했고,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옥기룡 역시 사형을 언제나 덩치만 큰 곰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장문위는 초식에 얽매이는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형과 격에 따라 정확한 동작을 취하고자 집착했다. 그것이 완전하지 못하면 그 뒤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외골수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무공이든 익히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인물이었다.

허나 지금 보니 사형은 절대 무시할 존재가 아니었다. 초식을 펼칠 때 느릿하게 펼치는 것은 오히려 빠르게 펼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정지되어 있다고 느낄 정도로 느릿한 동작을 펼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단지 발을 돌려 차는 동작을 생각해 보면 간단해진다. 단지 한 호흡을 내 쉬기도 전에 끝날 동작을 일각이나 걸려 천천히 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렇게 느릿하게 초식을 펼치는 것의 장점은 무엇보다 정확한 동작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저 흉내 내듯 빠르게 펼치면 그 동작이 완전한지 아닌지 자신도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렇듯 느린 동작이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완벽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벽함은 실전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옥기룡의 놀람은 그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사형이 펼치고 있는 자세는 너무나 느려 정지해 있는 듯 보였지만 완벽했고 빈틈이 없었다. 멈추어있는 그 상황에서 왜 공격을 하지 못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누군가 저렇듯 완벽한 자세를 공격했다가는 한 순간에 초식의 이름 그대로 하늘 가득 떨어져 내리는 유성우(流星雨)를 보게 될 터였다.

이것이 ‘정(靜)으로서 동(動)을 제어한다’는 이정제동의 가장 간단한 요결이었고, 그것을 장문위는 지금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옥기룡은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장문위의 수련 모습에 빠져들었다.

‘완벽한 만천성우의 자세는 아니다. 주로 권격(拳格)에 치우쳐 있다. 만천성우에 만권문(卍拳門)의 권법을 가미했다는 증거… 허나 사형은 만천성우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만천성우의 특징이 다른 무공과의 조화에 있는 점에서 옥기룡이 혈간의 무공을 가미했듯이 장문위는 가문인 만권문의 철권(鐵拳)이라 불리는 권을 가미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문위의 저 모습은 옥기룡에게 충격적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뒤처져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의 평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문위는 옥기룡의 빠른 두뇌회전도 따라오지 못했고, 정확한 판단력과 냉정함에도 뒤졌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옥기룡의 타고난 재질에도 미치지 못하여 먼저 배웠어도 늘 진도도 뒤처졌었다.

언제나 저만큼 뒤에서 끙끙거리며 따라오던 사형이 어느 순간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온 것이다. 그 간 결코 자신이 방심하고 놀면서 보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갑자기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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