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4회

등록 2007.03.05 08:10수정 2007.03.05 08:10
0
원고료로 응원
"사람들은 모습조차 본 적이 없는 포가장의 장주를 그렇게 부릅디다. 포대선생(鮑大先生)이라고… 이제부터 나도 그렇게 호칭하면 마음이 흡족하시겠소?"

중의는 침상 곁에 놓여져 있는 상의를 걸쳤다. 어떻게 안 것일까? 자신에게 다른 신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겨우 서너 명 뿐이다. 동정오우란 이름으로 같이 중원을 횡행했던 친구들마저 전혀 모르는 사실을 대체 저 놈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데리고 있는 포가장의 식솔들도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었다.


@BRI@"네 놈은 누구냐?"

옷을 대충 걸쳐 입은 중의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탁자로 다가갔다. 중의의 몸에서 언뜻 미세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허나 능효봉은 전혀 개의치 않고 미리 자신의 맞은편에 놓아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제 나와 차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드신 것 같구려."

"네 놈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까 말했지 않소? 한 가지 부탁하러 온 사람이라고…."


중의는 탁자에 앉으며 능효봉이 따라 놓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둘 필요는 없었다. 뭔가 있는 놈이었다. 충분히 그 내막을 알고 나서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그깟 알량한 사실 하나 알고 있다고 노부를 협박하러 왔다면 큰 오산이다. 알려지면 조금 귀찮아 지겠지만 노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야. 더구나 너는 큰 실수를 했어."


"……?"

"네놈은 노부가 침상에서 일어나기 전에 달아났어야 했다. 이제는 그 기회도 사라졌지."

중의의 몸에서 미세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그것은 아주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능효봉은 오히려 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도망가려면 내가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왜 왔겠소? 나는 포대선생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소."

정말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은 듯한 배포 큰 놈이었다. 더구나 이어지는 말에 중의는 오히려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내게 겁주려 하지 마시오. 고매하다는 포대선생의 위엄이나… 중원 천지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동정오우의 알량한 명성 가지고는 나를 어쩌지 못하오. 또한 내가 작정했다면 당신은 오늘 눈을 뜨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고, 지금도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중의란 이름도, 포대선생이란 호칭도 이 순간부터 사라지게 될 거요."

정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허풍도 정도껏 해야 그럴싸한 법이다. 어찌 중의 앞에서 이런 협박 아닌 허풍을 떨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 못해 괴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능효봉을 바라보던 중의는 이 작자의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중에 결과야 어찌되든 이놈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나? 꼭두새벽부터 미친놈을 만났군."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오. 포대선생의 오늘 하루는 그리 재수 좋은 하루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또한 나를 아는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미친놈이란 말을 하니 말이오."

중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목이 마르는 듯 찻잔을 비우고는 다시 다기에서 찻물을 따르고는 비어있는 능효봉의 잔에도 따라주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이 괴상한 놈은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무거운 중의에게 마구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혼란을 주고 있었다.

"그래 기껏 네놈이 생각하는 것은 노부가 네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포대선생이란 것을 나발 불고 다니겠다는 것이냐?"

능효봉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마저 훌쩍 마셔버렸다.

"어… 내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구려. 고매하신 포대선생께서 몰래 장난을 치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해 주어야겠구려. 독(毒) 같은 것 가지고 슬며시 장난치지 마시오. 만병을 고친다는 중의어른의 두 손이 영원히 몸과 분리되면 얼마나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겠소?"

눈치 빠른 녀석이다. 이미 시험 삼아 두 가지 독을 하독했다. 한 가지는 다기를 집으려 일어서는 순간에 공기를 타고 녀석의 코로 스며들었을 것이고,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미련스럽게 다 마셔버린 찻물에도 몸을 마비시키는 독을 사용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이제는 한 번쯤 손을 봐주고 천방지축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는 이 자식이 누군지 알아보아야 했다. 젊은 것들이란 아직도 혈기만 왕성해 종종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것이다. 더구나 뭔가 내력이 있는 놈 같아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 그러려면 일단 이 녀석을 적당히 주물러 주는 게 필요했다.

헌데 중의가 손을 쓰기도 전이었다. 능효봉의 손이 찻잔 옆에 놓여져 있었는데 장심을 탁자 위에 대고 있는 상태였고, 그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

젊은 놈은 확실히 초절정고수였다. 분명 그 연기는 내력으로 자신이 하독한 독을 태워 장심을 통해 배출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쇠보다 단단하다는 자단목(紫檀木)이 타는 냄새였다. 그러나 중의가 손을 멈춘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력으로 독을 내몰아 태우는 것은 동정오우 중 무공이 가장 약하다는 자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천룡인(天龍印)…?"

중의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떠지며 알아듣기 어려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능효봉이 슬며시 장심을 떼어낸 탁자 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경악과 충격에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뚫어져라 보아도 바로 그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아주 선명하게 장인(掌印)이 새겨져 있고 그 장인 안에는 하나의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용(龍)이 힘차게 치솟아 오르는 문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포대선생께서는 한 눈에 알아보시는구려."

어찌 잊을 수 있을 터인가? 구룡 중 수뇌였던 천룡의 독문비기가 바로 저것인데…. 세상의 무림인들이… 그리고 동정오우가 가장 두려워했던 천룡의 무학을 어찌 세월이 흘렀다고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

친구들이 둘러 앉아 수년을 연구해도 그 파해할 방도를 찾지 못했던 두 가지 무공 중 하나였던 것을… 아무리 비급에 적힌 요결(要訣)을 해석해도 익힐 수 없는, 그래서 비급이 잘못되었다고도 하였고, 인간의 몸으로는 익힐 수 없는 무공이라고 결론 내어 버린 그 무공을 말이다.

그것이 다시 완벽하게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십칠 년 전 이후로 아무도 익히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절기가 다시 탁자 위에 아주 뚜렷한 흔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 너는 그럼…."

비급만으로는 익힐 수 없는, 그래서 유일하게 저 무공을 익혔던 천룡에게 면수구결(面授口訣)을 받지 않으면 익힐 수 없다고 결론 낸 바 있으니 저 놈은 분명 천룡의 제자이었거나 후예가 분명하였다. 이제 때가 된 것일까? 저 자가 버젓이 운중보에 나타난 것은 분명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내가 왜 당신을 남들이 부르는 대로 중의어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를 알겠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완전하게 삭근제초(削根除草)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분명 구룡들에게 후예가 있음은 파악하고 있었다. 무공을 스스로 폐지한 육룡(六龍)을 살려 보냈던 것도 잘못이었다.

"으음…!"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운중과 혈간, 그리고 성곤은 반대에도 무릅쓰고 회에서는 은밀하게 손을 쓰고자 노력했다. 분명 구룡의 후예들이라면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회의 단호한 결정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2. 2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3. 3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4. 4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5. 5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