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시대에 미·일 '찰떡궁합' 깨진 이유

[取중眞담] 대북정책 이견에 일본군 성노예 갈등까지... 일본판 반미 행보 계속될까

등록 2007.03.07 08:57수정 2007.03.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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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하여 발언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AP / 연합뉴스


"미국 의회의 결의가 있어도 내가 사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가 마침내 미국을 향해 '분노에 찬' 한마디를 뱉어냈다. 옛 일본군 성 노예(군대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한 그의 발언을 둘러싼 야당 의원과의 5일 국회 설전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말이야 틀리지 않다. 미국 의회가 결의했다고 해서 꼭 일본 총리가 사죄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말을 '원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특히 외교 관련 발언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그냥 "결의안 추진이 잘못됐다"고만 해도 될 것을 굳이 "결의가 있어도 사죄하지 않겠다"고 결과까지 예단해서 쐐기를 박아두는 어법은 다분히 '감정'이 배어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충분하다.

미일동맹을 금과옥조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일본에서 총리가 미국 공공기관을 향해 이렇게 직설적으로 불만을 토해내는 장면은 극히 이례적이다. 벌써 일본 내에서 대미관계의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는 이렇게 감정을 표출할 만큼 요즘 미국에 대해 쌓인 게 많았던 것일까?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시대에 '찰떡궁합'으로까지 불리던 미일관계는 아베 시대 들어서 급속히 난기류에 휩싸여 있다. 아베 총리가 취임한 지 이제 겨우 5개월여.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대북정책 둘러싸고 벌어지는 입장 차이

미일관계에 생긴 틈새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입장 차이에서 비롯됐다. 정확히 보면 미국은 기존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180도 수정했고, 일본은 지난 수년간의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려는 데서 생기고 있는 갈등이다.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변심'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고농축우라늄(HEU) 의혹을 제기해 제2차 북핵위기 상황을 조성한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었다. '납치 문제' 등으로 이해가 일치했던 일본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따라가며 빈틈없는 공조를 이뤄왔다.

그런데 미국이 돌연 북한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유턴한 것이다. 그 시점이 공교롭게도 지난해 가을 고이즈미에서 아베 총리로의 교대기였다. 북한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맞서는 모습을 통해 국민적 인기를 얻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아베 총리가 받았을 충격을 가늠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평화적·외교적 해결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고 있는 자체 모순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2차 북핵위기의 출발이었던 북한의 HEU 의혹에 대해 스스로 '위기'로 판단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고, 둘째 스스로 폐기한 '제네바 합의'의 틀을 사실상 부활시킨 점, 셋째 "나쁜 행동에 대해선 보상을 주지 않겠다"던 말을 결과적으로 뒤집은 점 등.

5일부터 뉴욕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첫 회의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칙사 대접'은 미국의 달라진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일간 대북정책의 갈등은 지난 2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와 김계관 부상 간 베를린 회동부터 베이징 6자회담에서의 '2·13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표면화됐다.

일본은 "납치문제의 진전이 없는 한 대북 지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되풀이해 강조하면서 북한과의 타협을 견제하더니, 끝내 '2·13 합의' 때 북한의 비핵화 이행에 따른 상응조치에서 혼자만 빠졌다.

아베 총리는 '2.13 합의' 직후에도 납치 피해자가 가장 많은 니가카현을 찾아가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는 등 미국을 향한 '시위'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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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미국 히스패닉 상공회의소 초청으로 연설을 한 부시 미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아베의 이중적 태도가 불만인 미국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군 성 노예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아베 총리의 발언이 지난 1일 돌출되어 나왔다. 이번 사태는 미국 의회의 관련 결의안 추진이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 사이에서만 전개됐던 과거의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문제가 불거지자 미국 측이 즉각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인식 부재'를 질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이던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2일 "이 문제는 전쟁 중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개탄스러운 사건이라는 게 우리의 입장"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어난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에도 미국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도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제성 유무에 관계없이, 피해자의 경험은 비극이고, 일본의 국제적인 평판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AP통신, 파이낸셜타임스 등 구미 언론들도 일본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미국 측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일본에게 과거사 문제로 이 지역 국가들과 또 다시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갈등의 원인 제공을 일본 측이 하고 있다는 '질타'의 의미도 비교적 분명히 담겨있다.

결국 일본군 성 노예 동원의 '강제성'을 둘러싼 논란은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틈을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아베 총리가 '강성' 이미지 회복을 위해 일부러 택한 길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으나, 만약 그렇다면 너무 무모한 시도로 보인다.

아베 총리를 포함, 일본군 성 노예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해온 세력들은 '협의'와 '광의'를 구분, "광의의 강제성은 인정되지만, 협의의 강제성은 증거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간 것 자체는 '광의의 강제성'이고, 일본 관헌들이 직접 끌고 간 것은 '협의의 강제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바깥세계에서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이런 논리를 전개하면서 틈만 나면 '강제성'에 대한 부정을 시도해왔다. 아베는 총리 취임 이후 역사인식와 관련 1993년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정부의 입장을 정리해 발표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혔다.

'고노 담화'는 일본군 성 노예 동원에 있어서 일본 정부와 군의 관여,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이뤄진 점 등을 인정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런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강제성'은 부인하는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미일관계의 급속한 변화는 대북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됐지만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역사상 가장 양호한 상태를 보이고 있는 미중관계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의 관계에서 고질적 갈등 요소였던 대만문제 등에서 가급적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상호 협조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중국도 후진타오 주석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과거 정권들보다 훨씬 대미관계를 우호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같은 미중관계는 6자회담에서의 협력 등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힐 차관보 등 미 정부당국자들은 중국이 6자회담에서 의장국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역할을 거듭 높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도 한반도 문제에 지금처럼 정력을 쏟은 시기는 드물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황의 악화 등으로 아시아 쪽에 많은 신경을 쏟을 수 없게 되면서 이 지역 국가들간 협조적 질서 구축을 통해 힘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아베 정권이 보이고 있는 자세는 미국의 의도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의 의도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취임 이후 계속된 지지율 하락에 고심하고 있는 아베 총리는 대외관계에서의 타협 노선을 접고, 확실한 ‘강경 이미지’ 회복에 나섰다는 일본 언론의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미국과의 갈등을 감수하더라도 이렇게 나가는 것이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의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에 예정돼 있는 중국과의 정상외교 일정과 미국의 이해 등을 감안할 때 아베 총리가 계속 이 같은 노선을 밀고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다. 모든 국가간 관계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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