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56회

등록 2007.03.21 08:05수정 2007.03.2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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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두 차례에 걸쳐 암기를 날린 틈을 타 그 자가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자를 뒤쫓기 시작했소. 허나 경공에 매우 뛰어난 자였던지 쉽게 따라붙을 수 없었고, 그 자가 매송헌을 돌아 진가려 처소까지 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 자의 종적을 놓쳤던 것이오."


추교학은 그 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얹잖아진다는 듯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그 때 하필이면 내 눈에 기단의 돌이 살짝 빠진 구멍이 보였던 거요. 그곳이 진가려의 방으로 통하는 것인지 누가 알았겠소?"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추교학은 아마 그 기단을 빼내고 기습한 자를 좇아 그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뭔가 발견은 했나?"

성질 급한 풍철한이 물었다. 힐끗 풍철한을 본 추교학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다시 함곡을 보며 말했다. 아마 반말로 대뜸 묻자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방안에 들어가서 본 것은 두 남녀의 벌거벗은 시신뿐이었소. 나는 그들이 누군지 아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에 급히 되돌아 나온 것이오."

"누군가 자네를 흉수로 몰려했다는 말인가?"


다시 풍철한이 묻자 추교학은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띠었지만 시선을 풍철한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풍철한이야 어쩔 수 없는 인물인 것은 추교학도 아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 아니오? 암기로 나를 어쩌지는 못하오. 그것은 나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는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소."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에게 알려야 했을 것인데 흉수로 몰릴까봐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지금은 왜 그리 순순히 다 말해주는 것인지 알고 싶군."

풍철한 역시 예리한 데가 있었다. 아픈 곳만 찌르고 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곳을 지나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소."

"그 사람이 바로 진운청... 그 사람이었겠구려..."

함곡이 이제야 왜 추교학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며 진운청을 거론했던 이유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어차피 밝혀질 일이라 생각했지만 누가 선뜻 내 말을 믿어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이오."

또한 아마 지금 후계문제가 거론되는 중요한 시점에서 그런 사건에 연루된다는 것은 실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후가 입맛을 다셨다. 역시 추교학은 어리다. 아직 경험과 두둑한 배짱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다.

사실 자신과 미리 상의했더라면 이렇게 피의자로 신문을 당하는 입장 따위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곤혹스러운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칼자루를 쥔 입장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보주가 함곡과 풍철한에게 조사를 맡긴 상황에서 넌지시 불러 오히려 조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입장이 되었더라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흉수로 몰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 조사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말을 해주었다면 오히려 입장이 뒤바뀔 수도 있었다.

"또한 조금 전 함곡선생께 내가 그곳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느냐고 여쭈어 본 것이오. 만약 연청이 함곡선생께 말씀드렸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정보를 주었다면 그가 바로 나를 유인한 장본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오."

함곡은 또 다시 애매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 모습만으로는 도대체 함곡이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파악해 낼 수 없었다. 함곡이 입을 열기 전에 풍철한이 말을 던졌다.

"그 비밀통로에는 물론 아무도 없었겠지?"

풍철한이 당연한 것을 묻자 추교학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안에서 서향이 풍기지 않던가?"

추교학은 재차 이어지는 풍철한의 질문에 잠시 생각해 보는 듯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것 같기는 했지만 확실치는 않소. 당시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그 안에서 서향이 맡아지지 않았다면 그 서향의 주인은 추교학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단서 한 가지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 비밀통로에 오래 머무르셨소?"

"그 비밀통로에 머문 적은 없소. 금방 들어갔다가 나왔기 때문에..."

"익숙한 향이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소."

그냥 들어갔다가 나왔다면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냄새가 배지 않는다.

"추공자가 그곳에 들어간 시각이 자시 초라 하셨소?"

"그렇소."

"이미 죽어있는 시신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들이 언제 피살되었는지 판단 할 수는 있겠소?"

"시신을 만져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피 냄새가 진동하고 아직 피가 굳지 않고 조금씩 흐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았을 거요."

이제 대충 언제 피살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살해된 것은 술시 말, 자시 초다. 또한 그 비밀통로에 있었던 사람은 궁수유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추교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경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당두의 방과 신태감의 방을 다시 살펴보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물론이오. 다만 신태감의 시신은 침상에 올려놓았소."

경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흉측한 몰골로 죽어있는 신태감의 시신을 그냥 방치하기에는 좀 꺼림칙했던 모양이었다.

"얼마든지 조사를 하시오. 그 외에는 그대로 현장을 보존하고 있소. 다만 본관이 두 분을 모시기는 어려울 것 같소. 곧 추태감께서 들어오시기 때문에..."

"아..."

벌써 오전 운중선이 들어올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함곡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모습은 이미 추태감이 들어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어서 경후는 더 이상 부언하지 않았다.

"그럼..."

이미 풍철한과 추교학까지 자리에서 일어섰고, 함곡과 풍철한은 일단 서당두의 방으로 향했다. 추교학의 얼굴에는 뭔가 더 설명하고자 하는 초조한 기색이 있었지만 함곡은 오히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누명을 벗으려면 이것저것 말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또한 함곡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적당한 선에서 결론을 내지 않고 끝내야 나중에 더 많은 것을 토해낼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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