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를 시베리아로 이끈 '보이지 않는 손'

[정치 톺아보기 149] 누가 한나라당 탈당을 이끌었나

등록 2007.03.21 12:02수정 2007.03.2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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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19일 기자회견을 갖고 "오늘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새 길을 창조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떠나기로 했다"며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탈당선언을 한뒤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던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19일 기자회견을 갖고 "오늘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새 길을 창조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떠나기로 했다"며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탈당선언을 한뒤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던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고 의원, 그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냐. 손 전 지사도 여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1월 9일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념과 생각에 따른 정치재편'을 주장하면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을 실명으로 거론했다. 이념과 생각에 따른 정치재편은 지난 5·31 지방선거 이후 줄곧 김 원내대표가 강조해온 지론이지만 국회 대표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면서 같은 당(중도개혁통합신당)을 하자고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김효석 원내대표로부터 '공개 러브콜'을 받은 손학규 전 지사는 오히려 "김 의원 같은 분이 한나라당으로 오면 좋겠다"고 응수해 이날의 러브콜은 '싱거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때만 해도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 19일 손학규 전 지사는 예상을 뒤엎고 탈당을 선언했다. 그를 탈당으로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탈당에 대해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한나라당과 국민은 손 전 지사가 장고 끝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악수(握手)를 청하길 원했지만 결국 탈당이라는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고 논평했다.

손 전 지사의 선택이 '악수'가 될지 아니면 '묘수'가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탈당이라는 그의 선택이 '장고'의 결과라는 점이다.

탈당 결단은 장고의 결과


a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 그는 지난해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손학규 전 지사의 실명을 거론한 바 있다.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 그는 지난해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손학규 전 지사의 실명을 거론한 바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 탈당을 심각히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정치권에 떠돈 것은 지난 1월이었다. 손학규 캠프에서 지지율 답보에 마음 상한 참모들이 통음을 하며 탈당까지를 고려한 향후 진로를 둘러싸고 난상토론을 벌였는데 손 전 지사가 "나는 정치를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며 탈당론에 쐐기를 박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 소문을 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정상적으로 해석하면 물론 '손학규 탈당 불가론'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다르게 해석했다.


지난 1월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선 중도하차 선언 이후 손학규 탈당의 군불을 지펴온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오히려 "손 전 지사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탈당에는 명분이 필요한데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명분 쌓기에 유리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 전 지사의 탈당은 예정된 결과이다.

손 전 지사가 탈당을 결심한 직접적 계기는 대선후보 경선이라는 '게임의 룰'을 정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러나 불만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되었다.

손 전 지사는 경기도지사 재직시절에 자신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 못지않게 실적을 쌓았다고 자부해왔다. 그는 자신이 LG-필립스 반도체 등 외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 등 많은 실적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눈에 잘 띄는 청계천에만 주목하는 데 대한 서운함과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경기도 출신이라는 '지역의 한계'도 그에게는 높은 벽이었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의 위력은 여전하다. 그는 지역에 안주하지 않고 통합에 기여하는 자신이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혁신할 주도세력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기도 시흥 출신인 그가 지역성이 뚜렷한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박근혜·이명박과 경쟁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당내 조직의 부재도 그에게 좌절의 벽이었다. 특히 믿었던 당내 소장파의 변신에 좌절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부 소장파 의원들의 유력후보 줄서기로 자신이 믿었던 '수요모임'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소장파의 의지를 꺾고 억누르고 왜소화시키는 풍토, 대표적으로 편 가르기, 줄 세우기와 같은 것들은 한나라당의 새로운 정체성을 가로막는 핵심적인 저해요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이 이명박 대세론에 줄을 서는 현실을 제어할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탈당 기자회견에서 "한 때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일부 의원들과 당원들조차 대세론과 줄 세우기에 매몰되어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고 비판하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넘기 힘든 벽에 좌절감을 느끼던 손 전 지사에게 소설가 황석영씨와 시인 김지하씨 등의 집요한 탈당 권유는 그가 탈당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월초 귀국한 황석영씨의 탈당 권유가 거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탈당 결행이 참모들과의 교감은커녕 오히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행되었다는 점에서 과거 '운동권 동지'들의 권유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김영삼(YS) 전 대통령마저 그를 외면하고 이명박 전 시장을 지지했다. 그가 비록 운동권 출신이지만 15년 동안 한나라당에 둥지를 튼 현실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그가 탈당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YS마저 대세론의 손을 들어준 현실정치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그의 좌절감은 "한나라당은 원래 민주화세력과 근대화세력이 30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만든 정당의 후신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나라당은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탈당 회견에 잘 드러난다.

정치 입문시킨 YS마저 손학규 '외면'

a 이명박 전 시장은 지난 3월 13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등 현역 의원 63명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권의 에세이집 출판기념회를 갖고 대권을 행한 포부를 밝혔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악수를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은 지난 3월 13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등 현역 의원 63명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권의 에세이집 출판기념회를 갖고 대권을 행한 포부를 밝혔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악수를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92년 대선 경선에서 민주화세력인 김영삼 후보가 근대화세력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는 물론 대통령에까지 당선되는 역사를 지켜보았다. 또 1997년과 200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민주화세력은 아니지만 근대화세력도 아닌 이회창 후보가 승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2007년 선거에서는 이명박·박근혜 후보 가운데 1인이 대선후보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다. 손 전 지사가 말한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라는 표현이 두 사람을 지칭함은 불문가지이다. 그로서는 같은 민주화세력인 YS는 대선후보가 되었는데 왜 나는 안되냐는 좌절감이 컸을 법하다.

그러나 경기도지사를 지내고 대통령 선거에까지 나선 현실 정치인의 탈당을 좌절감 때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좌절한 그에게 출구를 마련해준 것은 중도개혁통합 세력이라는 마당이다.

김효석 의원의 손짓에 오히려 김 의원더러 오라고 손짓했던 손학규 전 지사는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선진화 대회'에 참석해 격려사를 했다. 이 모임의 물꼬를 튼 것은 재야 운동권 및 학교 후배인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다.

김부겸 의원의 외곽조직인 '선진한국연대'가 중도개혁세력 중심의 '전진코리아' 창립을 제안한 이 자리에는 김부겸 의원 외에 김효석 의원과 고진화 의원 등이 참석했다. 모두 여야를 아우른 '중도개혁세력 통합론자'들이다. 김효석 의원이 11월 정기국회에서 실명으로 거론했던 정치인들이 실제로 만난 것이다.

비판 여론에도 대선 후보 지지도 10%대로

그리고 그로부터 세 달 만인 3월 15일, 손학규 전 지사는 '전진코리아'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격려사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의 출현은 당위적"이라며 "우리는 새로운 정치질서 출현을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혀 탈당을 시사했다. 이날 행사 참석을 끝으로 산사(山寺)로 잠적한 그는 나흘 만인 19일 다시 백범기념관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손 전 지사가) 당에 남아 있어도 시베리아, 나가도 시베리아"라는 이명박 전 시장의 상황진단은 정확하지 않은 셈이다. 시베리아라고 해서 다 같은 시베리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시베리아여도 '햇볕'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100년 동토인 곳이 있다는 얘기다.

손 전 지사의 탈당 이후인 19~20일에 실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가 범여권 단일 후보로 확정될 경우를 가정한 가상대결 조사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모두에게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그의 대권도전 전망에 대해 55.0%의 응답자가 결국 실패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전체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는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 탈당 후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상승해 10.1%를 기록했다. 손 전 지사의 지지도가 10%대에 진입한 것은 처음이다. 또 가상대결조사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는 2배 차이로 뒤지고,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10% 가량 뒤지지만 10% 격차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수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남아있으면 3위 후보로 본선에도 못 나가고 고사할지도 모를 그에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점은 큰 성과이다. 여기에다가 현재는 한나라당 후보들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올해 대선이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의 3각 구도로 판이 짜여질 경우 운좋게 팽팽한 접전을 펼칠 수도 있다.

손학규 전 지사는 지난 2월 8일 사실상의 대선 출정 기자간담회에서 "한나라당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간명하게 답변했다.

"결국 사람이 아니겠나. 누가 간판이 되느냐는 것이다."

결국 손 전 지사를 '시베리아'(탈당)으로 이끈 '보이지 않는 손'은 그의 참모들도 운동권 동지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당의 간판이 되면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민주화세력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의 간판이 되면 당의 정체성이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가 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권력의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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