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을 구사하는 명나라에 완패당하다

[태종 이방원 67] 전술로 대응하는 조선

등록 2007.04.04 11:59수정 2007.04.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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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파상공세에 시달리던 이성계는 결국 윤규, 공부, 윤수를 명나라에 보냈다. 죽음의 길이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의 목숨을 지켜내지 못한 태조 이성계는 병이 나고 말았다. 심신이 지쳐 병석에 누운 것이다. 전장을 휘저으며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용맹을 떨치던 이성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비추던 태양이 서산에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를 포착한 정도전의 준비된 공세가 시작되었다. 사헌부를 동원하여 삼군 절도사와 상장군, 대장군, 군관 등 2백 92인을 탄핵하고 나섰다.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여기에는 이방원과 그의 추종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남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약방의 감초에 불과했다.


탄핵을 당한 자들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대부분 사병(私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대명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군권이 하나로 통일 되어야 한다” 는 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당하는 사람들은 수족을 잘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성계가 남은과 이지란 장사길 등은 개국공신이라 처벌할 수 없고, 이천우, 이화, 이방간, 이방의, 이방번, 이양우, 이방과, 이방원, 순녕군, 이제, 등은 왕실의 지친이라 벌 줄 수 없으며, 유만수와 정신의는 원종공신이므로 죄줄 수 없다고 수습했다. 하지만 사병을 해산하고 병장기를 반납하라 명했다. 천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양에 전운이 감돌았다.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방원, 결전을 준비하다

이방원 진영에서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이방원의 추동 사저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위패를 거느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병혁파라는 이름하에 꽁지 없는 장닭이 된 모습으로 방원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그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던 형 이방간을 비롯한 왕실 지친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며 하나같이 정도전을 성토했다. 정도전의 사병혁파는 자연스럽게 이방원 세력의 결집력을 촉진시켰다. 중도성향을 띠던 사람들마저 정도전 지지 세력이냐. 이방원 옹호세력이냐 확연하게 구분 짓게 되었다. 하륜이 찾아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안산군사로 나가있는 이숙번이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의협심이 강하고 믿을 만합니다. 긴요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륜이 함부로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방원은 잘 알고 있었다. 조선 개국 초기 고려조에 연민의 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실시한 과거시험이 절의파들의 저항에 부딪쳐 무산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여 2번째 치른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이숙번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6품 좌습유 직책에 있던 그를 방원이 개경에서 사냥할 때 한두 번 조우했던 인물이다.


사병혁파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정도전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갔다. 태조 이성계를 날마다 만나 요동을 공격하자고 주청했다. 심지어 병환 때문에 입궐하지 못하고 집에서 휴양하고 있던 좌정승 조준을 집으로 찾아가 남은과 함께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이건 논의나 상의가 아니라 명령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을 찾으며 6백 년 전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즉, 병권을 쥐고 있는 정도전이 완벽한 전쟁준비를 마친 후에 국왕 이성계의 입에서 요동정벌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어야 옳지 않았나 하는 분석이다. 전쟁 선언은 신하의 몫이 아니라 국왕의 몫이기 때문이다.

병법의 귀재 손자(孫子)가 “전쟁은 나라의 일대 중대사이다. 백성에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고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일이다”라고 설파했듯이 나라의 명운과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재상정치의 꿈을 펼쳐라

이성계는 최영장군의 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인물이다. 요동을 정벌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입에서 끝내 “요동을 공격하라” 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면 ‘요동정벌론’은 과감하게 폐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군사문제를 임금에게 일임해두면 자신의 입지가 넓어졌을 것이다.

혁명동지로서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가 넓어진 공간을 활용하여 그의 소신이자 꿈인 ‘재상정치’를 펼쳤으면 군주제하에서 진일보한 정치의 맛을 백성들에게 선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나주 유배지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목도하며 갈고 닦은 그의 애민사상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전쟁은 군사와 물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후방에서 세작(細作)이 뛰어야 한다. 정보 없는 전쟁은 패전의 지름길이다. 부실한 정보는 패배를 안겨줄 뿐이다. 우리의 정탐꾼들이 명나라에서 발바닥에 불이 났을 것이고 명나라의 염탐꾼들이 우리 나라에서 눈썹이 휘날렸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원나라 이후의 세계질서 재편 작업에 착수해 있었다.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를 몽고지방으로 밀어 붙이고 대륙의 맹주임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그러할만 하다. 그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의 기록에는 33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준비된 군사 대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를 치기 위해서 거병한 군사를 동으로 돌릴 것인지? 남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서역으로 돌릴 것인지를 집중 검토하고 있었다. 공식 정보창구를 운용하고 있던 정도전과 사설정보팀을 작동시키고 있던 이방원이 이러한 정세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훗날 안남(베트남) 정벌과 정화 함대의 아프리카 정벌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다. 극성스럽게 날뛰던 왜구를 제압하고 아시카가 요시미스를 일본 국왕에 봉하고 일본도 간접통치에 나섰다.

이러한 국제 정세 하에서 우리가 요동을 공략하여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기선을 제압하여 요동을 점령한다 해도 계속 우리의 영역으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을 런지는 미지수였다.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명제는 손자병법을 들춰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평범한 진리다. 명나라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몽고지방으로 밀린 원나라는 지리멸렬 힘이 없었다. 만주지방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여진족은 우리와 같이 명나라의 위세에 밀려 민족 존폐의 위기감에 직면해 있었다.

여진족은 우리와 때론 대립하고 때론 형제 국으로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러한 여진족과 동맹하여 명나라의 허를 찌른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명나라가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 여진족과 조선의 동맹이었다.

하지만 외교에 달통한 천하의 정도전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하여 여진족과 막후 접촉을 벌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진도에 의한 군사조련이 전쟁준비의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은 사병혁파를 목적으로 한 국내용이었다는 혐의를 받는지 모르겠다.

주승과의 지략대결에서 패배한 정도전

명나라는 구석에 몰린 원나라를 천천히 조이며 자중지란을 유도했다. 대륙의 패권을 거머쥔 주원장은 서둘지 않았다. 고비사막 너머로 패주한 원나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부치지 않았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궁즉통(窮卽通). “궁한 적은 통하는 길을 찾아 발악할 수 있으니 쫓지 말아야 한다”는 손자의 병법을 잘 지켰다.

이러한 전략은 조선을 향한 압박외교에도 맥이 닿아 있다. 주원장의 사부(師父) 주승(朱升)이 개발한 완칭왕(緩稱王) 정략이다. 주원장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만만디(慢慢的) 하고는 격이 다른 '천천히'다. 완칭왕(緩稱王)은 스스로 완(完)이라 결론짓는 것을 경계하고 성(成)이라 선언하는 것을 서둘지 말라는 것이다.

완칭왕 이라는 고난도의 정략을 바탕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부전이굴(不戰而屈) 전법을 병행하여 구사하는 명나라 외교 공세는 전략이었다. 표적을 정도전으로 설정한 ‘요동정벌론’은 전술적인 문제였다.

명나라는 고도의 정략과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하위개념인 전술적인 문제에 매달려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도전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대명 외교전쟁은 세상을 넓게 보고 작전을 구사하는 주승과 압록강을 경계로 전술을 펼치는 정도전과의 일전이었다. 결과는 황제를 사사하는 주승과 임금을 보필하는 정도전과의 지략(智略)대결에서 정도전의 패배를 의미한다.

명나라의 공세는 파상적이었다. 맞대응 한번 못해보고 조선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선장이 쓰러지면 자중지란뿐이다. 그것을 노리는 것이 명나라였다. 결국 조선은 선장이 쓰러지고 자중지란 즉, ‘왕자의 난’으로 그들에게 부전이굴의 쾌감을 헌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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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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