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타를 계속 날리는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66] 파상적인 외교 공세

등록 2007.04.02 18:56수정 2007.04.03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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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불사파와 전쟁 반대론자의 숙명적인 대결

신덕왕후가 돌아가자 태조 이성계는 서운관제조 권중화를 대동하고 손수 능묘 자리를 보러 다녔다. 전장을 떠돌던 사나이의 아내가 되어 갖은 고생하다 이제 왕비로 호강하려던 차에 세상을 떠났으니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 전쟁터를 전전하던 청년장교에게 강씨가 아니었으면 오늘날과 같은 왕이 되었겠느냐며 모든 공을 현비에게 돌렸다.


안암동과 행주, 그리고 취현방을 답사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낙점한 곳이 정동이다. 장례를 치르고 현비가 즐겨 찾던 연복사에서 불사를 일으키고 경천사를 찾아 불공을 드렸다. 경천사를 찾은 것은 현비의 극락왕생도 빌었지만 명나라에 시달리는 태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휴식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이성계에게 정도전, 남은, 심효생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자고 주청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좌정승 조준이 집에서 병을 앓고 있다가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극력 반대했다.

"본국은 옛날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天朝)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거사하여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태조실록>

"정승(政丞)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데는 가하지마는 큰일은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

남은이 반박하고 나섰다. 정승은 조준을 이르는 말이다. 조준은 경제문제에는 정통하지만 외교와 군사문제는 문외한이라는 뜻이다. 국론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병권을 손에 쥔 정도전은 군사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한편 태조 이성계를 용산강으로 안내했다. 사수감(司水監)에서 새로 짓고 있는 병선(兵船)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재 모 자동차회사 서비스센터가 들어서 있는 부지 주변에 대단위 병선 공작창이 있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군함을 만들어내는 조선소다. 최신예 병선을 시찰한 이성계는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정도전을 치하했다.

"정도전 데리고 가라" 권고했던 양첨식, 한 방에 가다


이 무렵, 전쟁을 감지한 양첨식이 조선에 와있던 명나라 사신 양첩모아와 우우를 비밀리에 만났다. 돌아가는 길에 꼭 정도전을 데리고 가라 권했다. 명나라에서 화의 근원으로 지목한 정도전을 방출하자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도전은 사헌부를 동원하여 양첨식을 탄핵했다. 그는 가산을 적몰당하고 섬으로 유배당했다.

명나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태조 이성계는 진화작업에 나섰다. 정도전을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내보냈다. 명나라에 대한 제스처다. 하지만 명나라는 압박의 고삐를 더욱 죄어왔다. 명나라에 다녀온 천추사(千秋使) 유호가 명나라 예부상서(禮部尙書) 정기의 글을 가지고 왔다.

"계본을 짓고 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회답하게 하면 사신을 환국하게 할 것이다. 금후로는 조공을 3년마다 한 번씩 보내고 또한 주본(奏本)과 계본(啓本)을 반드시 쓸 것 없으니 왕은 마땅히 살피라."-<태조실록>

방원이 명나라를 방문하여 복원하였던 1년3사 외교를 파기한다는 내용이다. 사신을 3년에 한 번씩 보내라는 것이다. 예부상서면 요샛말로 장관급이다. 명나라 장관급이 조선 국왕을 대하는 태도가 위압적이다. "마땅히 살피라"고 호령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3년에 한 번 조공한다면 신자(臣子) 된 마음에 스스로 편안할 수 없으니 다시 바라옵건대 전과 같이 하정(賀正), 성절(聖節), 천추(千秋) 때마다 조공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태조실록>

명나라 예부상서의 호통에 조선국 국왕 이성계의 답장이다. 이렇게 주억거렸으니 명나라에서 조선을 얕잡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도전을 총애했다. 동북면도선무찰리사가 되어 함흥 변방에 나가있는 정도전에게 중추원부사 신극공을 보내어 위로하면서 편지를 전했다.

"서로 작별한 지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하는 바가 매우 깊다. 이에 저고리 한 벌로써 바람과 이슬을 막게 하는 것이니 영납하면 다행이겠다. 춘한(春寒)에 스스로 보전해서 변방의 공을 마치라. 송헌 거사(松軒居士) 쓰다."

신극공편에 옷가지와 술을 내려보냈다. 혁명동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송헌거사라 불렀다. 경복궁 주변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삼각산을 타고 내려온 능선이 삼청공원을 지나 미 대사관저 자리를 지나고 종로구청에 이르는 곳에 소나무가 울창했다. 지금도 한국일보사 앞을 송현(松峴)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송헌거사라 칭하는 모습에서 권위를 파괴한 소탈함이 엿보인다. 이것은 혁명동지 정도전에 대한 극진한 동지애의 발로다. 이러한 진솔한 관계를 주군과 신하의 관계로 자리매김해야 할 책무가 정도전에게 있었다. 그러한 관계 정립 하에서 그가 펼치려 했던 재상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헌데, '한고조가 장자방을 부린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부렸다'는 듯한 개념으로는 정도전의 운신의 폭만 좁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북면에 좌천되었던 정도전은 4개월 만에 복귀하였다. 누가 원해서 라기보다도 서로가 원했다. 정도전 없는 이성계는 허전했고 한양을 떠난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과 국가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한양에 돌아온 정도전은 오진도에 의한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양주목장에서 진도훈련을 하는가 하면 이성계로 하여금 전라도와 경상도에 박영문을 파견하여 훈련 상황을 점검하도록 했다.

충성하는 신하를 계속 희생양으로 내보내는 이성계

명나라의 압박외교는 도를 더해갔다. 전 예조 정랑 윤규와 성균관 사성 공부, 예조 정랑 윤수 등이 명나라에 올리는 글에 '비슷한 발음의 글자로 장난쳐 중국에서 알아내는가를 보자' 고 모의했다는 혐의였다.

또 조선 임금이 '명나라가 노인도, 정총, 오세겸 등을 조선에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그들을 길잡이로 만들어서 조선 땅을 정벌하려는 것이 아닌지 자세히 알아보라"고 곽해룡에게 지시했다고 트집을 잡았다.

이른바 희모(戲侮) 간첩(間諜) 사건이다. 명나라를 희롱하고 간첩질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요구는 거셌다. 윤규와 공부를 압송하라는 것이다. 도당에서 연일 논의가 계속되었다. 서원군 한상경과 좌간의대부 정구는 '죽음의 길로 보내서는 안된다'고 했고 정도전 진영에서는 보내자는 의견이었다. 희생타를 날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변중량이 상소로 곧은 소리를 하고 나섰다.

"대국을 섬기는 예절로서 임기응변 계책으로는 불편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옳지 못한 명령에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굽혀 먼저 겁내고 약한 형세를 보인다면 잇따라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우리의 강한 형세를 보인다면 구류된 사신도 빨리 돌아올 것입니다."-<태조실록>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정곡을 찌르는 직언이다. 꼼수 부리지 말고 정면돌파하자는 것이다. 우유부단하게 임기응변 놀음하지 말자는 것이다. 계속 신하를 희생양으로 보내고 있는 임금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임금을 능멸했다고 순군옥에 하옥해도 아무 소리 못 할 만큼 수위가 높은 발언이다.

이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면 변중량이 끌려가는 것은 불문가지다. 죽음을 무릅쓴 소신이다. 그는 조국의 명운을 뒷전에 밀어놓고 편을 갈라 암투를 벌이고 있는 정도전이나 이방원 편에 서지 않고 조국의 편에 선 것이다. 변중량은 이러한 거침없는 강골 때문에 양 진영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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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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