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14회

등록 2007.06.14 08:37수정 2007.06.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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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돌발적인 광나한의 자진(自盡)에 좌중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엇이 그를 자진하게끔 만든 것일까? 무인에게 있어 승부는 삶과도 같다. 이기고 지는 것 역시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패배에 대한 충격이 자진을 할 만큼 컸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좌등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패배를 모르다가 한 번 패배한 사람은 더 이상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다. 특히 광나한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마음까지 패배를 승복한 인물이라면, 그리고 자신을 꺾은 인물을 주군으로 모시는 입장이라면 패배에 대한 인내와 극복이 가능하지만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은 패배를 맛 본 인물은 더 이상의 패배는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광나한의 성격으로는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성격이 그를 한계 짓게 만든 요인이었다. 승부를 즐기고 관조할 때에 비로소 몸으로 익힌 무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나 광나한은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하였다.

또 다시 부러진 자신의 북두장을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의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을 것이고, 충동적인 굴욕감과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책으로 자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움직임은 돌발적인 상황에 걸음을 멈춘 장문위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천천히 좌등의 옆으로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는 좌중을 쭉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숭무지례의 승자는 좌총관이십니다. 이 결과에 이의가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아주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태도였다. 수석교두가 허연 뇌수를 뿜으며 죽은 가운데에서도 장문위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가 이의를 달 수 있을까? 이의는 없었고, 모든 것은 끝났다.


좌등이 사방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이제 어느 정도 광나한의 자진에 대한 충격이 가시면서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려던 좌중은 좌등의 예에 분분히 답을 했다.

"좌모가 감히 한 말씀드리려 하오."

창을 들고 선 좌등의 모습은 마치 관운장과 비견할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패자와 승자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모든 것을 얻는다.

"운중보의 주인은 보주이외다. 그것은 운중보가 세워진 이래 변함이 없소. 따라서 운중보에 들어온 분들이라면 보주께서 세운 율법에 따라야 하오. 사사로이 움직여 본 보를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보의 율법에 의해 처벌될 것이오."

이 숭무지례를 하게 만들었던 광나한에게도 했던 말. 광나한이 그것을 거부했기에 여기까지 이르렀다. 아마 좌등이 운중보에 들어와 있으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자 하고 싶었던 일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좌중은 좌등의 폭탄선언에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좌등 저 작자가 정신이 있는 자인지 의심스러운 인물들도 있었다. 운중보 위에 군림하고 있는 회의 존재를 모른단 말인가? 어찌 회의 회주가 두 명씩이나 있는 자리에서 저런 망발(妄發)을 한단 말인가? 분명 알면서도 저런 망발을 하는 것은 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고 도발이었다.

"만약 내 말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조용히 본 보를 떠나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비무를 청해도 좋소."

못을 박는 말이었다. 좌등 스스로에게도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림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라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했다. 좌등의 시선이 쭉 좌중을 훑는 순간 시선이 마주친 화산파의 장문인 자하진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화산은 무적신창의 말씀에 따를 것이오."

생긴 것이 본래 원숭이상이다. 거기에 주름이 접히며 웃음을 띠우자 아주 간사해 보였다. 옆쪽에 자리하고 있던 무당의 인물들이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떠올렸다.

'원숭이 놈...!'

허나 그보다 더 못마땅한 인물들은 바로 각원선사와 지광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의자에 털썩 무너지듯 앉아있던 각원선사는 위태롭게 서 있던 소림의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절망과 회한이, 그리고 무능함에 대한 자책이 광나한이 했던 것처럼 자진하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었다.

지광 역시 다르지 않았다. 꽉 쥔 주먹사이로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화산의 약삭빠름은 눈엣가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미 역시 좌총관의 말씀에 따를 거예요."

회운사태가 나서는가 싶더니 삼합회의 회주인 궁단령마저 나섰다.

"삼합회 역시 운중보의 율법을 중시하고 무적신창께서 한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따를 것을 약속드려요."

갑작스런 상황 변화가 이어졌다. 지금 좌등의 말에 따르겠다고 말한 세 사람이 회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회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 당황스러운 쪽은 추태감과 상만천 일행이었다. 아미야 그렇다 치더라도 화산이 나서고 삼합회가 들고 일어난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

"좌총관께 한 말씀만 묻겠소."

나선 인물은 삼재 중 천과였다. 더 이상 두고 보다가는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해 나선 것이다. 일에는 적절한 시기와 맥이 있는 법이다. 그 시간이나 맥을 놓치면 그 보다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러도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말씀하시오."

좌등이 몸을 돌려 천과를 바라보았다.

"좌총관의 말씀은 보주의 지시로 인한 것이오?"

"아니오. 이것은 본보의 총관으로서 규율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의 결과는 내가 책임질 것이오."

"그렇다면..."

천과가 다시 뭔가 말하려하자 좌등이 말을 잘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말에 이의가 있다면 언제든 비무를 받아주겠소."

말이 필요 없다는 의미다. 불만이 있으면 덤비라는 말이다. 이것은 정면으로 도발하는 말이었다. 천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좌노제.... 운중이 나중에 질책을 한다면 어찌할 셈인가?"

보다 못한 중의가 나선 것이다. 좌등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만약 보주께서 문책을 한다면 달게 받겠소이다. 어차피 이 목숨 보주께 맡겼으니 목숨을 내놓으라 한들 아깝겠소?"

좌등은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수도 적은 편이었고, 되도록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보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선택하라는 듯 오연하게 천과를 응시하자 천과의 뒤에서 인후(人冔)가 한발자국 나서며 천과와 시선을 교환했다. 천과는 잠시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후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본인은 인후라 하오. 무명소졸이지만 무적신창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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