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13회

등록 2007.06.13 08:29수정 2007.06.1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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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토록 빠르게 반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더욱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는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좌등의 공격권을 벗어나려 했지만 동시에 환영처럼 파고든 아홉 개의 창을 모두 피해내지는 못하였다.

츠읏---!


그의 가슴 언저리가 베어지며 옷깃이 나풀거렸다. 창끝이 살짝 살갗을 긁은 듯 핏줄기가 언뜻 보였다. 그는 급히 서너 발자국을 물러섰다. 허나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던 좌등의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멀찍이 물러서 창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북두장이 꽂혀있는 삼장 정도의 거리 정면에 서 있었기 때문에 광나한이 북두장을 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마 조금 전 공격에서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면 어쩌면 끝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

좌중은 숨을 죽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잊혀졌던 한 사내의 진면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태도였다. 운중이라는 한 인물의 수하를 자처하면서도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내. 좌중의 몇 사람의 뇌리에는 젊은 시절 좌등이라는 사내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광나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역시 존경할만한 사내다. 다른 사람 밑에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그릇이 큰 사람이다. 광나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북두장을 꼬나들었다. 좌등의 손에 창이 들린 이상 어쩔 수 없다.


광나한은 지금껏 그리 많이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진실된 무공은 권각법이 아니라 바로 소림의 봉법(棒法)이다. 더구나 철담에게 패한 이후 그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해왔다. 타격을 위주로 한 전통적인 소림의 봉법에 날카로움과 살상력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북두장 역시 그래서 변형한 것.

촤르르르---


몸을 풀 듯 북두장을 돌리자 부드러운 파공음을 낸다. 사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북두장을 잡기를 기다려 준 좌등에 대한 멋쩍음의 표현이라 해도 무방했다. 동시에 허공에 세 번을 휘둘러 예의를 표한 광나한이 또 다시 좌등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번쩍---파파팍----

기이하게도 바닥에 북두장의 끝을 대고 좌등을 향해 짓쳐 들어가는 터라 바닥에서 불꽃이 튀면서 마치 북두장 전체에 불이 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돌로 된 바닥 역시 길게 금이 그어지고 돌가루로 화해 마치 건조한 평원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듯 먼지가 뿌옇게 허공에 피어올랐다.

북두장은 어떤 면에서는 창과 다를 바 없었지만 움직임은 창과 달랐다. 찌르기가 위주인 창과는 달리 베는 효용은 도의 날카로움을 능가하고 있었다.

타타타탕탕---

순식간에 광나한의 북두장과 좌등의 무적신창이 불꽃을 튀며 이십여 차례 마주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움직임들이었다. 현란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광폭하다고 해야 할까? 단 한 순간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비끗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터였다.

"…!"

지켜보는 좌중의 얼굴에 감탄과 서늘함이 동시에 교차되고 있었다.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이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모두 절정고수들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엄청난 살기와 기세가 주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사방 천전에 걸린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꺼질 듯 하면서도 꺼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흐르고 잠시 기세가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욱 위험한 초수(招手)가 교환되고 있었다. 공격은 광나한이 주로 많은 편이었지만 누가 더 우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대결이 이어졌다.

이백초가 지나자 상황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고, 어느덧 사방에 걸린 촛불도 절반 정도나 타들어가고 있었다. 좌등은 서두르지 않았고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움직임은 유려(流麗)했다. 중요한 방위를 선점하며 허점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광나한의 장법(仗法)을 헤치며 간간이 파고들던 모습에서 이제는 오히려 광나한을 차근차근 압박해 들어갔다.

무림인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전쟁터에서나 필요할 것이라 폄하했던 창술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삼백여 초가 지나자 사정은 더욱 확연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였던 광폭한 광나한의 공세는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방어하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당황하는 표정도 역력했다.

스스슷---- 파--팍---!

좌등의 신형이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몸은 지면과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사각을 이루며 광나한을 향해 짓쳐 들어갔는데 그의 창끝은 마치 뱀의 혀처럼 모든 각도를 점하고 광나한을 물어뜯으려 하는 것 같았다. 광나한은 좌등의 공세를 지연시키고자 북두장을 돌리며. 베며 찔러 댔지만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주륵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강했던가?'

광나한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쩌면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모른다. 아니 정말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좌등은 무림 배분으로 본다면 동정오우와 같은 서열이다. 동정오우가 있음으로 해서 가려져 있던 불운한 영웅이다. 동정오우 중 보주의 수하로 있다고 해서 세간은 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창을 잡자마자 자신은 거대한 벽에 마주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인 이상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좌등도 마찬가지일 터. 기세가 꺾인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밀리다가는 제대로 반격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어차피 결판은 내야했다. 지쳐가는 육신을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깎아야 한다. 그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더욱 지친 듯 보였다. 광나한의 의도를 모르고 좌등은 완전히 승기를 잡은 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움에서 벗어나 더욱 과감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이어지는 좌등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은 광나한의 오른쪽 상체가 훤하게 비었다. 좌등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무적신창이 광나한의 어깨를 찌르는 순간이었다. 북두장이 돌아갔던 광나한의 오른팔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보이더니 바로 왼쪽 가슴을 타고 돌았고, 동시에 그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든 좌등의 무적신창이 빠져나와 재차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파악----!

광나한의 어깨와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기우뚱하며 오른팔이 치켜 올라가고 오른손으로 무모하게 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격렬한 통증으로 인한 본능적인 반응처럼 보였지만 그 겨드랑이 사이로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북두장의 칼날은 빛살과 같은 속도로 다가온 좌등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번쩍----!

몸으로 회전하는 속도에 탄력을 준 북두장은 광나한의 몸통을 돌면서 더욱 가속이 붙으며 어디선가 불쑥 빠져나온 듯한 착각과 함께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좌등의 가슴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좌등은 이미 광나한의 오른쪽 상체를 공격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오른쪽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누이며 광나한의 좌측으로 따라붙었던 것이다.

파파팍----!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적신창은 무자비하게 광나한의 오른쪽 복부까지 파고들어 빠져 나오면서 북두장의 중간을 강타해 날리고 있었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북두장이 두 토막으로 부러졌다. 그리고 모든 동작이 멈췄다.

광나한의 오른쪽 상체, 어깨와 가슴 그리고 복부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었지만 광나한은 지혈을 하거나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은 부상은 그리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텅 빈 동공은 부러져 나가 칠팔 장정도 날아가 뒹구는 부러진 북두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였다. 철담에게 패한 그 때와 같았다.

"흐흐흐…그렇게 높은 벽이었던가?"

울음과도 같은 실소와 중얼거림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중의와 성곤의 옆에 서있던 장문위가 비무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승부는 끝났소. 이의가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돌연한 상황이 벌어졌다.

퍼퍽----!

광나한이 좌등에게 갑자기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하는 것 같더니 자신의 오른손으로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친 것이었다. 허연 뇌수와 함께 핏물이 뭉개진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잠시 휘청거리는 몸이 뒤로 묵중하게 넘어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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