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21회

등록 2007.06.25 08:16수정 2007.06.2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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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 역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만약 보주가 아니라면…. 이 목갑은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목갑은 보주가 함곡에게 보낸 목갑이었고, 이 목갑을 받고서야 함곡이 움직였습니다. 보주가 철담어른이 가지고 있던 회의 신물을 수중에 넣고 함곡에게 전하려 한 내막을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전하는 자체가 함곡이 움직여 달라는 신호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상만천이 고개를 저었다.

“보주가 이 목갑을 손에 넣고 함곡에게 전하려 했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아? 회의 신물이 담긴 목갑이야. 그것을 함곡에게 보냈다는 것은 함곡과 함께 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을 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니었을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물론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나 전달된 것은 회의 신물이 아니라 바로 이 혈서입니다.”

“그럼 이러한 내막을 아는 또 다른 자가 목갑 안의 내용물을 바꿔치기 했다?”


“목갑 자체를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상만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 목갑은 진품이야. 회의 신물을 넣어둔 목갑이 분명하지. 다만 똑같은 재질로 바닥을 얇게 덧씌웠던 거야. 목갑의 진품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뚜껑에 있지.”

상만천은 회의 회주 중 한 사람. 목갑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보주가 내준 목갑에는 회의 신물이 들어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혈서가 들어있었던 것일까?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누가 주모자인지 확실히 밝혀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용추의 판단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봉인이 뜯기지 않았다고 주모자가 보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다. 오히려 용추의 심중은 누군가에 의해 목갑의 내용이 바꿔치기 당했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함곡은 매우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함곡은 자신이 이 사건에 뛰어드는데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그에 대한 징표로 동조하는 인물들의 혈서(血書)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혈서가 도착하자 봉인도 뜯지 않고 운중보로 들어온 것이지요.”

함곡을 움직이기 위한 목갑의 전달은 회의 신물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혈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그 자가 회의 신물을 가지고 있고, 대신 이 목갑에 혈서를 대신 넣어두었단 말이로군.”

“이 목갑을 좌등의 수하인 진운청이 가져왔다는 사실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용추는 혈서의 맨 첫 번째 이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좌등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사건은 보주… 또는 누군가와… 좌등… 그리고 함곡이 주모자입니다.”

이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내막이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좌등과 팔숙… 이들이 팔숙일까?”

좌등과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한 인물을 제외한 여덟 명의 이름들….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상만천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복잡한 상념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용추 역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용추가 상만천을 응시하다가 상만천이 눈을 뜨자 탄식을 하는 듯 입을 열었다.

“역시 함곡은 생각할수록 무서운 자로군요.”

“……?”

“외부의 변수…. 어떤 일을 계획하는데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공모자조차도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자신이 노리는 상대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까지 정확히 예측하고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까지 하고 있는 능력이 있으니 말입니다.”

용추의 말에 상만천이 무언가 깨달은 듯 용추를 응시했다. 용추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불쑥 물었다.

“왜… 철담어른에게 손을 쓰셨습니까?”

그 질문에 상만천은 용추를 응시했는데 용추는 애써 시선을 피한 채 탁자 위의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상만천의 얼굴에 어색한 듯한, 그리고 아주 애매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자네와 상의하지 않고 처리한 것이 섭섭했던 모양이군.”

시인이었다. 중의가 우려했던…. 이 사건의 주모자가 바로 재보 자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만천에게도 분명 그런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헌데 그런 의도까지도 함곡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용추의 지적에 상만천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담어른은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매우 긴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철담어른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추태감이 혈간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지. 이제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철담은 변했네….”

“……?”

“수개월 전부터 그는 뭔가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듯 했네. 그것이 패륜이라 할 궁수유와의 관계 때문이 아닌가 치부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네. 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했을 뿐 아니라 나와 추태감에 대한 태도도 변했지.”

“그럼…?”

“알았던 거야. 추태감과 내가 가는 길은 틀려도 목적은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 챘던 것이야. 내가 요구하는 것…. 추태감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지. 심지어는 나에게 은근히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회를 이용하려 한다면 반드시 막겠다는 의사도 전해왔어.”

“으음….”

세 명의 회주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과 갈등. 어차피 곪을 대로 곪은 상처는 표피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회의 존재까지도 사라질 판이었다. 도려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너무나 위험한 변수였으니까…. 철담을 얻을 수 없으면 내가 꿈꾸는 대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어. 오히려 추태감에게 붙으면 지금 가진 내 모든 것까지 잃어버릴 상황이었으니까….”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 도박이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상황에서 그가 택할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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