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동지를 죽일 수 없다

[태종 이방원 113] 아무리 작아도 매는 매다

등록 2007.06.29 09:27수정 2007.06.29 16:29
0
원고료로 응원
태종 이방원은 6대언(代言)과 의령군 남재, 철성군 이원, 사간 최함, 정언 박서생, 집의 이조를 불러 사건 당사자와 대질심문 하라 명했다. 대사헌 권진과 우부대언 조원, 동부대언 이승간은 하륜이 사직할 때 임명된 신진이다.

대질자는 병조판서 윤저, 참찬의정부사 유양, 총제 성발도, 평강군 조희민, 칠원군 윤자당, 이조참의 윤향, 호조참의 구종지였다. 모두가 한때는 민무질과의 관계가 돈독했던 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늪에 빠져드는 사람에게 지푸라기 역할을 하느냐? 밀어 넣는 작대기 역할을 하느냐 기로에 선 것이다.

"네가 민무질에게 무슨 말을 들었느냐?"

심문관이 구종지에게 물었다.

"신이 민무질의 집에 갔었는데 민무질이 말하기를 '상당군 이저가 폄출(貶黜)된 뒤로 나는 항상 주상께서 의심하고 꺼릴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을 내지 않았는데 들은 자가 누구란 말이냐?"

"지금 사생(死生)이 관계되는 곳에 나와서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민무질이 흘겨보자 구종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눈에 핏발이 서는 살벌한 설전이다.

죄인의 명줄을 죄는 증언

"민무질이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주상이 광연루에 나아가서 이숙번에게 '지금 가뭄 기운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아래에 불순한 신하가 있기 때문이라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불순한 신하는 제거하는 것이 가합니다'라고 하였다 하는데 '이숙번이 주상께 하소연하여 우리들을 해치고자 할까 걱정이다' 하였습니다."

"과연 이런 말을 하였느냐?"

심문관의 물음에 민무질이 변명하지 못했다. 이어 병조판서 윤저가 말했다.

"주상께서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할 때 민무질이 비밀히 내재추(內宰樞)를 정하였는데 조희민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병조판서의 증언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청한 대질심문에서 민무질의 명치끝을 누르는 증언이 튀어나왔다. 권력이 양녕대군에게 넘어간 것을 기정사실화 하여 관직이 배분되었다면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다. 현직 임금을 능멸한 것이다.

내재상(內宰相) 또는 내상(內相)이라고도 불리는 내재추는 환관 하고는 격이 다른 신하다. 궐내의 임금 곁에 항상 있으면서 국사를 논하던 대신들을 말한다. 고려 때 이 제도가 국정을 전단한다는 지탄을 받아 태조 때 폐지하였으나 정종 때 부활하였다.

지푸라기는 없었다

a

“전하, 죄인을 엄하게 다스려 주소서.”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재현 사진입니다. ⓒ 이정근

민무질의 대질신문이 끝났다. 민무질은 얼굴을 붉힐 뿐 더 이상 변명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은 여러 공신과 신하를 돌려보낸 후 이숙번을 불렀다.

"민무질 민무구 신극례를 그들의 자원에 따라 지방에 안치하려 한다. 하륜을 찾아가 그 처치가 마땅한지 알아오도록 하라."

관직을 사임하고 재야에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자문을 구하는 것인지 재가를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태종 이방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태종은 하륜의 꾀주머니를 총애했고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자원안치는 유배에 처한 죄인이 원하는 곳에 기거하게 하는 부드러운 형벌이다.

"마땅히 경한 법전으로 처하여야 합니다."

가볍게 처벌하여 경고성 제재를 가하자는 얘기다. 이숙번을 통하여 하륜의 얘기를 전해들은 태종 이방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륜의 말은 곧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와 같다."

장우는 한(漢)나라 성재 때의 정승이다. 태종 이방원은 중국 역사를 꿰고 있었다. 이 말을 이숙번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륜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민무구 형제를 가볍게 벌하여 지방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정부와 대간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엄중문책 하여 대명률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간의 상소를 뿌리친 태종 이방원은 민무구를 연안(延安)에, 민무질을 장단(長湍)에, 신극례는 원주(原州)에 안치했다.

순화동 3인방을 귀양 보낸 태종 이방원은 영의정 이화,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이무를 광연루(廣延樓)에 초치하여 잔치를 베풀며 조용히 일렀다.

"민무구 등 세 사람의 죄는 다시 중하게 논하지 말라. 다시는 도성 안으로 불러들여 일을 맡기지 아니하고 천년(天年)을 마치게 할 것이니 경들은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다시는 논계(論啓)하지 말라." - <태종실록>

이것이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바라보는 태종 이방원의 시각이었다. 혁명을 같이한 동지이고 왕비의 동생들이기에 목숨은 빼앗고 싶지 않았다. 단 왕도에 불러들여 권력의 언저리에 서성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태종 이방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굴러갔다. 탄력을 받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에 공직자들의 교훈이 숨어 있다. '있을 때 잘 하라' 라는 것이다. 평소에 덕을 쌓고 적을 만들지 않아야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 원군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다. 사건 와중에 유명을 달리한 민무질의 아버지 민제는 "너희들이 매우 교만하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혁명 동지를 죽일 수 없다

삼정승을 불러 민씨 형제의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기를 당부했지만 대간은 물론 공신과 백관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임금이 뿌리치고 주청을 들어주지 않자 공신과 백관이 대궐에 나아와 전정(殿庭)의 동쪽에 서고 대간과 형조는 서쪽에 서서 민무질 등 세 사람에게 죄 주기를 주청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들을 피해 동문을 빠져나와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분은 태상왕 병문안이었지만 극렬하게 주청하는 신하들을 잠시 피하기 위해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지신사 황희를 불렀다.

"백관과 공신들이 물러갔느냐?"
"전하께서 환궁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려 환궁하겠다."

주청하는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는 한 환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신하들이 물러갔다. 민무구 형제를 죄 주자는 신하들과 이쯤에서 멈추자는 태종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태종 #이방원 #민무구 #민무질 #하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년 만에 8개 발전소... 1115명이 돈도 안 받고 만든 기적
  2. 2 자식 '신불자' 만드는 부모들... "집 나올 때 인감과 통장 챙겼다"
  3. 3 김흥국 "'좌파 해병' 있다는 거, 나도 처음 알았다"
  4. 4 23만명 동의 윤 대통령 탄핵안, 법사위로 넘어갔다
  5. 5 김건희 여사 연루설과 해병대 훈련... 의심스럽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