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계획일까? 마지못한 대응일까?

[태종 이방원 114] 불목과 불충

등록 2007.06.30 18:34수정 2007.06.3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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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신(三功臣)의 상소가 올라왔다. 삼공신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이방원의 혁명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定社功臣) 그리고 이방간과 벌인 개경 시가전에서 공을 세우고 이방원의 등극에 이바지 한 좌명공신(佐命功臣)을 말한다. 모두가 태종 이방원의 권력기반이다. 탄핵을 받고 있는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 역시 공신이다.

"민무구 등이 삽혈(揷血)하며 훈맹(勳盟)에 맹세한 글이 맹부(盟府)에 간수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세 사람은 맹세를 어기고 사특한 마음을 품어 불충한 말을 여러 번 입으로 발설하였습니다. 세 사람을 공신명부에서 삭제하고 녹권(錄券)을 회수하여 전날의 맹세에 신(信)을 보이시고 후일의 간사한 자를 징계하소서."

살아있는 사슴을 잡아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며 변치 말자고 맹세했던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가 맹세를 어겼으니 엄한 벌을 내려 맹세의 신뢰도를 높이자는 것이다.

"민무구, 민무질의 공신녹권을 거두어라."

신하들의 충성 경쟁에 임금이 밀리고 말았다. 녹권 회수는 정치적인 사형선고다. 죄인의 몸으로 귀양 간 민무구 민무질의 공신녹권을 회수한 태종 이방원은 그들의 아우 민무휼과 민무회를 편전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는 병조판서 윤저, 참찬의정부사 유양, 호조판서 정구와 6대언(代言)이 배석했다.

처남을 치는 매형의 솔직한 심정

"여흥부원군은 곧 중궁의 아버지이고 세자는 그 외손이다. 내가 부원군으로 하여금 세자전에 통래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부원군 부처가 운다고 한다. 세자는 본래 부원군 부처가 안아서 키운 것인데 지금 문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인정으로 말하면 우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의 마음으로 편안치 못할 것이다. 내가 세자에게 통래하거나 문안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너희 두 형이 죄를 지어 외방에 귀양 가 있는데 그 마음에는 '내가 무슨 불충한 마음이 있는가?'고 할 것이고 너희들도 또한 '우리 형이 무슨 불충한 죄가 있는가?'고 할 것이다. 너희 부모의 마음에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지금 내가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할 터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부모에게 고하도록 하라.

불충이라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지친에게는 장차(將)가 없다.'고 하였으니 장차(將)가 있으면 이것은 불충인 것이다. 설사 만일 내가 정안군으로 있었을 때에 너희 형들이 나에게 쌀쌀하고 야박하게 굴었다면 이것은 불목(不睦)이 되는 것이고 불충은 아니 되는 것이지만 지금 내가 일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저희가 쌀쌀하고 야박한 감정을 품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불충인 것이다.

창덕궁이 이루어졌을 때 내가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감독관을 위로하고 우리 아이(兒子-세종)가 글씨를 쓴 종이 한 장을 내어 돌려보였더니 민무구가 신극례에게 주고서 또 눈짓을 하여 신극례로 하여금 술 취한 것을 빙자하여 찢게 하였다. 이것이 불충이 아니고 무엇이냐?

또 하루는 민무구가 곁에 있기에 그 뜻을 보고자 내가 말했다. '네가 지난번에 군권을 사임하고자 하였는데 지금 사임할 테냐? 내 사위 조대림도 군권을 해임시키겠다.'고 하니 민무구가 매우 성을 내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신을 만일 해임하면 전하의 사위도 해임하여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 마음이 불경하고 말이 천박하기가 이와 같았다. - <태종실록>

내가 들으니 너희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주상이 이미 우리를 싫어하니 우리들은 여기에 있을 수 없다. 마땅히 각각 가속을 데리고 나가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니 너희들이 나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신은 알지 못하는 말입니다."

민무휼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지금 내가 이처럼 말이 많으니 너의 형제가 반드시 나더러 참소를 들었다고 할 것이다. 내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내 소원이 참소를 분변(分辨)하여 듣지 않으려는 것이다. 옛날에 민무구가 어느 사람을 나에게 참소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네가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너를 참소하는 것을 믿겠느냐."

"옛날에 이거이가 불충한 말을 하였는데 그 아들 이저도 아비의 죄 때문에 또한 외방으로 폄출(貶黜)되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거이의 말을 이저가 듣지 못하였을 리가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희 두 형들의 죄가 또한 부원군에게 연루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태종실록>

처가에 쳐놓은 태종 이방원의 그물망은 촘촘했다. 치밀한 성격 그대로다. 예사롭게 흘려 넘길 일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매부이자 임금인 자신의 조치에 반발하면 화가 아버지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순응하라는 것이다. 씨줄과 날줄로 엮은 하륜의 직조술도 놀랍다.

왕비도 여자다, 질투가 심했다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민무구 형제의 탄핵사건이 터지자 충격을 받은 것은 중궁전을 지키는 정비였다. 열일곱 처녀의 몸으로 두 살 연하의 신랑을 지아비로 맞이하여 하늘같이 섬겨왔다고 자부해왔다. 신랑이 좌절하면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지아비가 뒤로 물러서면 앞장서기도 했고 야인 이방원이 힘들어 하면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에 오르도록 헌신한 친정에 올가미를 드리우다니 심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데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여자를 비빈에 앉히고 잉첩도 모자라 반반한 후궁은 죄다 꾀어 차는 꼴을 이만큼 보아주는 여자가 있으면 '나와 봐'라고 하늘에 소리치고 싶었다.

아녀자의 투기가 심기를 거스렸다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투기?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사나이의 넓은 가슴으로 이해해 주기를 기대했고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아비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독점하고 싶었다. 그래서 후궁들이 우글거리는 대궐보다도 순화방 생활이 그리웠다. 지아비가 임금이 아니었던 시절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독점이 죄라면 달게 받고 싶었다. 조강지처의 투기가 미우면 자신을 내치면 됐지 왜 처남들이냐 하는 것이다. 동생들이 조금은 경망스럽기로서니 처남들을 얽어 넣는 것은 가혹하다 싶었다.

정비 못지않게 충격의 늪에 빠진 것은 아버지 민제였다. 임금의 국구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교만한 성격의 아들 형제가 항상 걱정이었다. 노심초사 하던 일이 결국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한 민제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딸 아이 혼례식장에서 '사위의 얼굴에 왕기가 서린다'는 하륜의 얘기를 들었을 때 두려움과 기대에 가슴 떨렸고 사위가 임금의 자리에 등극했을 때 하륜의 예지력에 경탄했었다. 그러한 하륜이 아이들의 흠결을 귀뜸해주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의 대척점에 선 것이 야속했다. 딸은 권력이 미웠고, 아버지는 정치가 야속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상심에 싸여있는데 양녕대군은 즐거웠다. 사신단을 이끌고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 간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자 양녕은 종묘와 인소전을 찾아 조상에게 중국방문을 고했다. 덕수궁과 인덕궁에 들러 태상왕과 상왕을 배알했다. 어른들을 찾아뵙고 중국 방문을 고한 양녕은 중궁전에 들러 어머니 정비에게 명나라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했다.
#이방원 #민무구 #민무질 #민제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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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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