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7회

등록 2007.07.18 11:01수정 2007.07.1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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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오른쪽 벽과 벽 귀퉁이에 하얀 나신이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풍만한 나신이었으니 사내가 보았다면 욕정을 느낄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사정은 그게 아니었다. 나신은 축 늘어져 벽에 매달려 있었다.

젖가슴 사이에 무언가 관통해 벽까지 파고들자 그것이 시신을 쓰러지지도 못하게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피도 얼마 배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죽은 후에 그렇게 매달아 놓은 듯했다.


염비는 나신을 드러낸 시신이 누군지 알았다. 또한 그녀의 가슴을 관통해 그녀를 드러눕지도 못하게 만든 물체가 무언지도 알았다. 그녀로서는 모를 수 없는 존재였다. 삼비 중 음율(音律)과 창(唱)에 뛰어난 현비(賢妃)가 바로 그녀였다.

"……………!"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어찌된 일인지 생각을 추스르기도 전에 허리에 뜨끔한 느낌을 받고는 몸이 경직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목에 감기는 섬뜩한 촉감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치 목걸이 같은 가는 금사인 것 같았는데 이미 목을 옥죄고 있었다.

"이 년이 염비란 년일 겝니다."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천궁문(天宮門)의 삼비란 위치는 타 문파 어느 곳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쉽게 상대에게 제압당했고,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계심이 느슨해졌고, 사실 운중보 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문주의 거처다. 이런 곳에 현비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벽에 붙어 죽어있는 모습을 보자 여자 특유의 공포와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고, 그 순간에 그녀는 당한 것이다.

스읏----


그녀의 앞으로 한 인물이 천정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주 가는 무엇인가로 자신의 목을 휘감은 자신 바로 뒤에 있을 터였다.

"아마 그럴 걸세."

그녀의 전면으로 떨어져 내린 인물은 바로 천과였다. 그리고 염비의 뒤로 모습을 나타낸 인물은 뜻밖에도 손번(巽幡)이었다. 홍교를 노리다가 생사판의 방해로 몸을 빼내 사라졌던 그 인물이다. 그는 양손에 아주 가는 금사(金絲)를 둘둘 말아 쥐고 있었다.

"네… 네놈들이…?"

염비는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입에서 나오는 데로 호통치려 했으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목을 감은 금사는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고, 그녀의 목울대를 지나는 순간 입에서는 목소리 대신 피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쩌고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먹이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의 목줄을 쥐었고 반항이나 다른 것을 생각하기 전에 목줄을 끊었다. 삼비 중 하나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홱 뒤집어졌다. 그것을 본 천과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찍 죽는다고 억울해 하지마….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삼합회의 년놈들은 이 밤이 새기 전에 숨을 쉬고 있는 자가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목적은 오직 죽이는 것뿐이었다. 이제 자신들이 직접 나선 이상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래 끌어서도 안 된다. 축 늘어져 쓰러지는 염비에게 시선을 거두며 손번이 고개를 흔들었다.

"늙은 여우와 살쾡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는 이미 염비의 목을 감았던 금사를 파 한 방울 묻지 않게 깨끗하게 닦아내면서 중얼거렸다. 늙은 여우와 살쾡이란 궁단령과 남궁정을 가리킨 말일 것이다. 천과가 고갯짓을 했다. 가자는 의미다. 대답은 그 뒤였다.

"필시 궁수유… 제 딸년 거처에 있겠지…. 우리가 조금 늦게 왔어…."

그 말과 함께 천과와 손번의 신형이 문을 벗어남과 동시에 빠르게 사라져갔다. 밖은 어느새 서서히 땅거미가 잦아들고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운중보를 피로 덮을 마지막 밤이 바로 삼합회의 거처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삼합회의 거처에는 숨 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삼합회의 인물들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인물은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잠시 후 회랑 아래쪽에서 슬며시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경비의 책임을 맡고 있는 곽정흠이었다. 그는 천과와 손번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잠시 탄식을 내쉬었다.

"매우 잔혹해…. 사정을 봐주지 않는군. 이제 삼합회 인물 중 살아있는 사람은 겨우 세 명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인후가 그런 처참한 죽임을 당하면서 예상된 것이기도 했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후부터 추태감과 상만천이 은밀하지만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운중보 내에서 이제 들어 내놓고… 살육제(殺戮祭)라도 벌이겠다는 것인가?"

움직임이 정말 심상치 않았다. 경비의 책임을 맡은 터였고, 지금은 적당한 선에서 눈을 감고 넘어갔다. 허나 오늘밤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비무사 가지고는 막을 수도 없는 일. 또한 막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헌데 왜 연락을 주지 않는 것이지…?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지침을 받아야 그 다음의 행동을 할 것 아닌가? 그저 지켜만 보라는 것인가?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직접 찾아가 보고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의 이목이 있어 행동에 제약은 따르겠지만 본래의 임무가 경비책임자이니 어디를 가든 다른 사람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한 뒤 몸을 돌리는 순간에 저쪽에서 한 인물이 보이며 다가왔다.

"어디에 계신가 한참이나 찾았더니 여기에 계셨구려."

자신과 함께 운중보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삼수검 엽락명이었다. 그는 곽정흠의 앞으로 다가와서 다시 물었다.

"헌데 무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오?"

곽정흠은 턱짓으로 삼합회가 머무는 거처를 가리켰다.

"사태가 심각하네. 삼합회 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어…"

그 말에 엽락명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도대체 왜…?"

엽락명은 전각에 시선을 던지며 낯을 찡그렸다. 어차피 사건이 발생하면 고생하는 것은 경비 책임을 맡은 자신과 곽정흠이다.

"추태감의 심복인 천과와 손번이…."

말끝을 흐리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엽락명을 바라보았다.

"헌데 왜 나를 찾았던 것인가?"

"아니…, 추태감의 심복이… 아… 그렇구려. 남궁정인가 하는 인물에게 당한 인후의 복수를 하는 것이겠구려…. 그렇다 해도… 백주대낮에…."

엽락명은 여전히 시선을 전각 쪽에 두고서 곽정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직 찡그린 낯을 펴지 않은 채였다.

"좌총관께 보고를 해야겠지?"

곽정흠이 엽락명의 시선을 따라 전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란 이상한 것이 별로 볼 것도 없는데 옆 사람이 계속 시선을 한 곳에 두면 따라 보는 경향이 있다.

"보고는 무슨…?"

엽락명의 말투가 이상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곽정흠은 자신의 전신을 덮는 살기에 급히 고개를 돌리며 뒤로 몸을 튕겼다.
#천지 #이웅래 #운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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