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학의 정문인 서문.김종성
이번 7월은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되는 달이다.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소도시인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동아시아인들의 항일역량을 결집시켜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초래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대표되듯이,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인들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로 신속히 단결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단결 움직임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국립서남연합대학의 결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일전쟁(1937~1945년) 초기인 1938년 초에 중국 서남쪽인 윈난성 쿤밍에서 결성된 서남연합대학은 각각 베이징 및 텐진에 소재한 베이징대학·칭화대학과 난카이대학의 연합대학이었다.
노구교사건 발생 직후만 해도, 이 사건이 8년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리라고는 예상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 직후만 해도 위 대학들은 전화(戰火)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칭화대학이 이번 7월 6일에 발행한 주간지인 <신칭화> 1691호에 실린 첸다이순이라는 인물의 회고에 따르면, 노구교사건 직후에 국민당 정부가 개최한 뤼산회의에 참가한 중국 지도자들은 대체로 사건이 평화적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정부 역시 사건 초기에는 불확대방침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29일 베이핑(베이징의 당시 명칭)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중국인들은 항일투쟁을 위해 신속히 결집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인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의 예상과 달리 상황이 악화되자, 1937년 8월 국민당 정부는 베이징대학·칭화대학·난카이대학에게 후난성 창사로 가서 임시대학을 결성할 것을 명령했다. 수도 베이핑이 일본군에게 함락된 데에 따른 대응조치였다.
창사로 옮겼을 당시의 연합대학 명칭은 창사임시대학이었다. 이듬해인 1938년 초에 윈난성 쿤밍으로 다시 옮긴 뒤에는 대학 명칭이 국립서남연합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소속 대학들이 본거지로 돌아간 것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일이었다.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약 8년 정도 존속한 이 서남연합대학의 흔적을 오늘날의 베이징대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숲과 호수와 잔디밭의 자연미가 아름다운 베이징대학 구내의 서북쪽을 걷다 보면, 숯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흔적이 선명한 낡은 비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국립서남연합대학 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 구성원이 보여준 높은 항일투쟁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