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처 벽면에 전시된 원세개의 초상화.김종성
물론 원세개의 무례는 그의 후견인인 북양대신 이홍장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감독(이홍장)의 작전(조선 국왕의 기를 죽이라)을 그렇게 잘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본래 무례한 자질을 타고 난 '선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원세개의 무례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하나는 사인(私人) 원세개의 무례이고 또 하나는 공인(公人) 원세개의 무례다.
여기서 사인 원세개의 무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 듯하다. 왜냐하면, 개인적 예의범절을 논하게 되면 그 개인의 인물 됨됨이뿐만 아니라 그 부모의 무능함까지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원세개 집안의 가풍 문제는 현대 한국인들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공인 원세개의 무례함일 것이다.
공인 원세개의 무례함이라는 것은 조선 현지의 중국 대표자로서 그가 저지른 무례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청 정부의 국제적 무례함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당시 청 정부의 대(對)조선 외교가 어떤 면에서 무례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민족 왕조에 대해 사상 최초로 내정·외교 간섭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 폐위 음모까지 시도했다는 점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홍장-원세개 라인을 통한 청 정부의 대조선 외교는 그 정도가 매우 지나친 것이었다.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은 그 양상이 과도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청나라의객관적 역량을 초과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예라는 것은 각 주체의 객관적 역량에 따라 차별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 파워를 행사하려고 할 경우, 그것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무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조선 간섭정책의 출발점인 1879년 8월 21일자 광서제의 유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중국이 한민족 왕조에 대해 간섭정책을 전개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 이전의 한중관계에서 한민족이 중국에 대해 대체로 형식적 하위에 있었다고는 해도, 양국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상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관계였다. 전통시대에 중국이 한민족의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한민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국의 국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한중관계는 상호 자율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1882~1894년 시기의 간섭정책이 일제식민당국 등에 의해 확대 해석되어 한국인들의 뇌리에 인식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과거 한민족이 중국 앞에서 자율성을 상실한 채로 살았다는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흥미를 가질 만하다. 서양이 동아시아를 침략하지 않았을 때에는 한민족에 대해 간섭을 감행하지 못한 중국이 왜 하필이면 서양이 들어온 이후에 처음으로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서세동점 이전에 중국이 한민족에 대해 간섭을 행하고 서세동점 이후에는 중국이 서양의 기세에 눌려 한민족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중관계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이 동아시아를 침략한 서세동점 이후에 중국이 한민족에 대해 최초의 간섭정책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말 속에 문제의 포인트가 담겨 있다. 바로 서양의 힘을 바탕으로 중국이 한민족의 내정·외교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편전쟁(1840년) 이후로 약 20년간 서양은 중국침탈을 위해 대(對)중국 공세를 강화했다. 그런데 대체로 1860년대부터 서양의 중국침탈은 그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거기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에서 나타난 중국 민중의 역량에 서양열강이 놀란 것이 하나의 이유라면, 세계 양대 최강인 러시아와 영국이 186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정책을 추구한 것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이유에 논의를 국한시키기로 한다.
1860년 중국-러시아 베이징조약(흔히 '북경조약') 이후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었다.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영국-러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그 틈을 활용하여 청나라-일본-프랑스-독일-미국 등이 영향력을 강화하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그러니까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1부 리그(영·러)와 2부 리그(청·일·프·독·미)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도한 상호대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영국·러시아는 조선반도가 상대국의 단독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을 보호하려면 조선반도를 완충지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느 나라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특정 국가를 대리인으로 삼아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상대국이 영향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1880년대 이후 영·러가 선택한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다. '믿을 만한 그리고 만만한 대리인'을 2부 리그에서 뽑아 조선반도에 배치함으로써, 1부 리그 라이벌이나 여타의 2부 리그 국가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