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웃어 보세요"

이주노동자들의 영정사진 촬영 봉사

등록 2007.07.31 18:23수정 2007.08.0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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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왔어요?"
"아직 보정한 파일도 받지 못했는데. 보정하고 나면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사진 인화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걸."

꾸르(Kur)였습니다. 지난 일요일(7월 29일) 태풍이 오나 싶을 정도의 비바람이 지나간 후, 날씨를 걱정하며 인근 노인요양원에 영정사진 촬영 봉사를 갔었는데 그 결과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일요일 찍었던 사진 파일은 사진영상반 선생님들이 갖고 가서 보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 왔던 꾸르 본인은 그날 정작 카메라를 만져보지도 못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날 꾸르는 날씨가 신통치 않아 모델이 되신 어르신 곁에 켜 놓은 작은 스탠드를 보며 얼굴이 환하게 나오라고 반사판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었습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고 반사판을 사용한 것은 어르신들 표정이 좀 더 자연스럽고 곱게 나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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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 중, 반사판이 유난히 밝다 ⓒ 고기복

사진을 주로 찍었던 사람들은 지난 3월부터 '사진영상반 교실'을 통해 기초적인 카메라 작동 원리와 사진 찍는 방법, 영상 편집 등에 대한 원리들을 배우고 연습해 왔던 에꼬(Eko)와 아디(Adi)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에 마냥 웃다가도 자리에 앉으면 표정이 굳어버리는 어르신들을 위해 반사판을 들고 '웃어 보시라'고 권하며 촬영을 도왔었는데, 그 모습들이 사뭇 진지하기만 했었습니다.

사실 노인요양원에 영정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했을 때, 우려되는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는 '봉사활동으로 한다고 하지만, 영정사진이라는 것을 찍는다는 사실을 어르신들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부분이었고, 그 다음은 '모델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 고작 몇 개월 배운 실력 갖고 실수들은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기 전에 "어르신, 웃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러 가자, 요양원 원장님께서 "어르신들 사진 곱게 찍어 드렸다가 필요할 때 쓰면 좋지요" 하시며 영정사진이 없으신 분들 중에 사진을 찍기 원하시는 분들을 소개해 주셔서 편하게 사진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은 요양원 본관 앞에서 했는데, 만약을 위해 한 분당 네 컷씩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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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는 모습 ⓒ 고기복

저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시는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의 연세를 여쭙기도 하고 고향이 어디신지 묻기도 하다가, 사진을 찍고 방으로 들어가던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에 호기가 느껴졌습니다.

"아따, 나가 저 나이면 사진 안 찍어. 왜 찍어."
"어르신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 여든."

그런데 옆에서 듣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끼어들었습니다.

"여든이여?"
"아니, 여든넷인가? 여덟인가? 그쯤 되어. 나이 솔찮이 먹었어."
"아, 왜 나이가 왔다 갔다 해."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는 나이를 시비 거는 할머니 말씀에 콧방귀도 뀌지 않으시고 "저 양반, 이자 칠십 조금 넘었지" 하며 웃으시더군요. 할머니 말씀이 아니더라도 '요양원 내의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이 여든 정도 된다'는 복지과장님의 귀띔이 있었던지라, 일흔은 젊은 축에 속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어르신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더욱 실감이 났습니다.

오전에 내리던 비가 막 그쳐 덥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은 좋은 날씨 속에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어르신 한 분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기 위해 둘러선 사람들은 마치 영화를 찍는 것처럼 신이 났었고, 그것을 보는 어르신들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손자뻘 되는 피부색 다른 청년들의 서툰 우리말에도 이주노동자들이 어디 가면 쉽게 듣게 되는 질문인 '어느 나라에서 왔소'라고 묻는 분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이 사진을 찍으러 온 청년들을 어찌 그리 애틋하게 보시는지, 마치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사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사진 촬영했던 이주노동자들 역시 살아 있다면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고향에 두고 온 청년들이고 보면, 어르신들에게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달라도 사는 이치는 같다'고 했던가요? 부모형제, 친지가 그리운 것은 고향 떠난 이의 한결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꾸르는 비록 자신이 찍지 않았지만, 사진이 잘 나오기를 기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던 길, 요양원 뜰에 있던 연꽃의 싱그러움 같은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뒤로 들렸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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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요양원 앞 뜰에 있던 연꽃 ⓒ 고기복

덧붙이는 글 | 사진보정이 끝나면, 인화한 다음 액자에 넣어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덧붙이는 글 사진보정이 끝나면, 인화한 다음 액자에 넣어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영정사진 #이주노동자 #사진영상 #가족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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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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