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46회

등록 2007.08.07 09:05수정 2007.08.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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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소축이 화마에 휩싸여 있사옵니다.”

미려(美麗)라 불리는 이십대 초반의 시비는 급박한 상황을 전하는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쩌면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 보주의 성품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제자들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추교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사부의 눈치를 보았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술이 떨어졌구나.... 몇 병 더 가져오너라.”

미려란 시비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운무소축이 사라졌다는 보고에도 보주는 술타령이다.

“아가씨께서.. 어찌 되었는지....알 수가 없사옵니다.”

아무 말 없이 주인의 분부를 이행했던 것이 지금까지 운중각 시비들의 태도였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고, 중대한 일이 터졌다 하더라도 주인이 아니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달랐다. 보주가 유일하게 아끼는 딸의 안위다.


“허....어....”

보주가 입맛을 다시며 재촉을 하자 미려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떠올리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쪽문을 통해 나갔다.


“사부님.... 사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듯 하온데....”

장문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다른 제자들도 모두 한마디씩 거들 태세였다. 보주는 제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추교학이 우슬을 사랑하는 것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너희들은 그 아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구나.....”

제자들의 표정과는 달리 보주의 얼굴은 아주 태연했다. 자식을 둔 아비의 입장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무슨 말씀이온지....?”

“그 아이는 매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아주 특이한 동물적인 본능과 같은 능력이지.”

개미나 벌꿀....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들은 지진이 난다든가 폭풍이 몰아칠 것을 미리 감지한다. 보주의 말은 바로 이런 능력을 우슬이 가졌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래도....”

옥기룡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보태자 보주가 고개를 저었다.

“또한 사람의 운명까지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운무소축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을 모르고 있었을 아이가 아니다. 그 아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인물은 이 중원에 없다. 있다면 오직 한 사람뿐이지.”

“.............?”

모두 약간은 놀란 표정을 띠었다. 우슬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주의 확고한 믿음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졌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우슬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누군지 솔직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보주의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중의... 그 친구만이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다. 그 아이의 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시력을 잃게 한 것도 바로 중의 그 친구이지....”

놀랄 일이었다. 우슬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중의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우슬의 시력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 중의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더욱 경악할 일은 자신의 딸에게 금제를 가해 시력을 잃게 한 인물이 친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놔두고 있는 사부의 태도였다.

도대체 사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왜 가만히 있는 것인가?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딸에게 금제를 가했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왜 지켜만 보았던 것일까?

“.............!”

사부의 예리한 시선이 다섯 제자들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제자들의 가슴은 웬일인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사부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마저도 손바닥의 손금을 보듯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들 중 일부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만약 자신이나 사형제들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것은 확실히 사부로서 제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미 말을 했듯이 사형제들 간 칼부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신 때문에 사부가 오늘 이 자리를 만들지 않았나하는 우려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공교롭고 기이한 일이었다. 운중보의 보주이면서도 보 내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또한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스런 일이었다.

“사부께서는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질문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동시에 둘이었다. 장문위와 옥기룡. 다른 제자들 역시 똑같은 물음을 여쭙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또한 이 질문에는 단지 우슬에게 금제를 가한 인물이 중의인지를 알면서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의미와 더불어 크게는 지금까지 왜 사부가 운중보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있겠지?”

사부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제자들은 일제히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꿈이라면 한결같이 사부의 뒤를 이어 운중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고 난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단순히 일단 그 꿈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아닌 게 아니었다. 그 질문에 제자들은 한결같이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에게 지금 당면한 유일한 꿈은 사부의 뒤를 이어 운중보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판이었다.

정말 그 뒤에 어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운중보의 주인이 되고 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린애와 다를 바 없이 기껏해야 가문이나 자파의 위상을 높이고 중원 무림을 호령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특히 장문위와 옥기룡의 충격은 다른 사제들보다 컸다. 왜 사부가 제일 먼저 얼핏 제자들에게 운중보를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로 말을 꺼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무림이 왜 협과 의가 살아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 어리석고 단순했었구나.....!’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언제나 남들 앞에서 떠들어 댔듯, ‘무림의 평화’니 ‘질서와 존중’, ‘공정한 무림’과 같은 속 보이는 얄팍한 말은 꺼낼 수 없었다. 결국 목적은 무림의 패권을 한 손에 쥐어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으니까.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면 나서는 것이 도리다. 복수로 모든 일이 끝난다면 누군가를 죽여도 좋겠지. 허나 세상일이란 자신의 관점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도 시기적으로... 또는 다른 관점에서 옳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자(尺)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사부가 나서지 않는 이유다.”

말 한 마디로 무림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어쩌면 실제로 좌지우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부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넓은 안목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제자들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때 미려가 쟁반에 술병을 가득 올린 채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술병을 하나씩 보주와 제자들 앞에 놓기 시작했다. 아마 밤을 새우며 이 술을 마셔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제자들은 오히려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허나 사부의 뜻이 그렇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꿈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천지 #무협소설 #이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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