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은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무협소설 <천지> 279회

등록 2007.10.01 09:19수정 2007.10.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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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도착했네. 많은 식구들을 달고 왔구….’

풍철한의 음성에는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그들이란 물론 설중행과 능효봉 일행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조력자들이 왔으니 걱정을 덜었다는 의미도 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저들과 상대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여하튼 함곡이 자신 있게 논조를 펴가자 용추는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충이라도 상만천과 추태감의 야욕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함곡 혼자 떠드는 논조에 자신의 일행, 특히 육파일방의 인물들이나 교두들이 말려들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일사불란(一絲不亂)한 통제가 어려워져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다.

아마 함곡이 혼자 남아 자신들을 맞이할 때에는 이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힘이 아니라 입으로 설득해 이쪽을 흩으러놓기 위해서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 자신이 나설 때다.

“동림당…아주 허울 좋은 사람들이지….”

용추가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며 입을 열었다.


“아주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이래라 저래라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특히 툭하면 민초들을 위해서라는 전제를 달고 말이야.”

“관직을 차지해 민초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고혈(膏血)을 짜내 축재(蓄財)나 야욕을 채우는 무리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주는 것이 지자(智者)의 도리이자 책임. 비록 천자(天子)를 직접 모시지는 못하나 그래도 천자의 땅에 몸담고 사는 사람이라면 의당히 그래야 하는 것이요, 그것이 천자를 보필하는 백성의 도리가 아니겠소?”


“역시… 아주 허울 좋은 말만 하는구먼. 동림당원이 관직에 올라있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그들이라고 달랐을까? 물론 자네야 민초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겠지만 다른 동림당원들도 그랬을까? 그들 역시 가진 자들이었네. 그들 역시 학문을 독점하고 배운 자들이었네. 그 지방의 관헌들보다 어떤 점에서는 더 위세를 떠는 자들이었지. 동림당이란 이름으로 말이야.”

용추의 지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학문을 도야하고 글줄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은 민초들이 아니었고,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더구나 동림당이란 이름은 민초들에게 많이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었던 재야 집단.

“더구나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 충고랍시고 비난을 하고, 민초들을 선동하는 짓거리나 해대는 자들이었네.”

“그들을 폄하하지 마시오. 적어도 용추형처럼 세욕(世慾)에 타협한 사람들이 아니오.”

“그런가? 그렇겠지. 하지만 이런 예는 어떨까? 현감이 마을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려고 했네. 매년 우기(雨期)에 물난리를 덜고 가뭄이 지속될 때 농민들에게 물을 대주기 위함이었지.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동림당원이라는 작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용추는 입술이 타들어 가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입술을 혀로 한번 핥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불만 많은 민초들에게 부역(賦役)을 시키기 위한 것이고 현감의 업적을 만들어 놓기 위해 그런 결정을 했다고 비난했지. 벼슬이 더 높아지려면 뭔가 업적이 있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현의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고 말이야. 물론 그런 점 역시 배제할 수 없겠지. 허나 그리도 극구 반대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네. 저수지를 만들게 되면 자신의 땅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지.”

“……!”

“결국 민초들을 선동해 불만이 터져 나오자 현감은 그 일을 포기했다네. 헌데 이듬해 홍수로 인해 수백 명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지. 그러자 또 그 동림당원이란 작자는 현감의 부덕의 소치라고 떠들어댔다네. 자칫 자신이 욕을 먹을까봐 말이지.”

동전의 앞뒷면의 차이는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현실에서 부닥치는 갈등 역시 이런 것이다. 사리사욕을 초월한 청렴결백한 관리가 그 얼마나 있을까? 민초들은 애초부터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아왔듯 그런 인물은 거의 없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사리사욕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진심으로 백성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허나 어떠한 일이든 반대를 위한 반대이거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언제나 대안 없는 비난은 더욱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아주 특이한 것을 예로 들어 동림당원 모두를 나쁜 사람들로 몰아가는구려.”

“동림당원들이 손가락질 했던 관료들이나 태감들 역시 마찬가지지. 실상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고충을 생각해 보기라도 했나? 모든 것은 자기의 주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단정 지어 버리더군. 내가 젊은 치기로 한 때 동림당에 동조했다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것도 그 이유라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작자들이 입만 가지고 나불대는 것….”

“그래서… 동림당원들을 샅샅이 찾아내 죽여 버리고 이제는 역모에 가담하기라도 결정하셨단 말이오?”

“역모라… 그렇지… 하지만 눈을 크게 떠보게.”

용추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움직였을 터.

“언제까지 공맹의 가르침… 아니 자귀(字句)에 매달려 판단하지 말고….”

“…….”

“역사를 보게. 이 중원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져갔네. 이미 대명의 국운(國運)은 쇠(衰)한지 오래. 이제 대명도 자칫하면 송(宋)의 전철을 밟을 위기에 처해있네.”

송(宋)은 동북방의 요(遼)에 시달리고 금(金)의 침입에 명맥만 유지하다가 원(元)의 말굽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혀 사라졌다. 그 말뜻을 모를 리 없다.

“궤변으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오?”

“궤변이라도 좋네. 자네가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본다면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네. 국운이 쇠하면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이 바로 민초들이야. 내 나라 백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네.”

“이렇게 까지 되도록 쥐새끼처럼 국운을 갉아먹은 자들이 바로 당신이 두둔하는 저들이 아니었소? 대대로 황상의 눈을 멀게 하고 그 권력에 기생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지금까지 대명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자들이 저들이 아니었느냔 말이오?”

“어느 나라 어느 시기라고 관료들이 없었던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맹장을 등용해 국경을 방비함은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모든 책임은 천자가 져야 할 일이네.”

“참으로 편리한 발상이구려. 단물은 모두 빨아먹고 나서 책임을 황상에게 돌리다니 말이오.”

누구의 책임일까? 역사에 수많은 나라가 명멸했듯이 국운이 쇠하고 사라지게 만든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독점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가? 아니면 그를 보필하지 못한 관료들이? 그것도 아니라면 백성이 져야할까?

“답은 없지… 허나 중요한 것은 이거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지. 벌써 황제를 자칭하고 이곳저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만 십여 곳이 넘네. 또한 동북방의 이민족은 중원을 삼키려 코앞까지 다가왔지. 이미 중원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게나. 지금 공맹의 가르침에 따라 충(忠)을 내세울 것인지….”

이렇듯 입장이 다르다.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대립된 의견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린 것일 뿐.

“그들 손에 넘겨주기 보다는 아예 내가 차지하겠다는 아주 이기적인 결론에 도달했다는 말이구려.”

비꼬듯 함곡이 말을 흘리자 용추가 뭐라 하기 전에 상만천이 또렷한 음성을 발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나는 자네 같은 인재를 아끼지. 자네가 나를 비웃고 욕한다 할지라도 나는 자네를 얻을 수 있으면 만족할걸세.”

말과 함께 상만천은 손을 들어 까닥했다. 그것을 신호로 멈추어 있던 흑백쌍용이 쾌속하게 함곡을 향해 쏘아갔다. 어찌되었든 함곡 먼저 수중에 넣거나 그것이 안 되면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덧붙이는 글 | 추석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인테넷 사정으로 오늘 약간 늦었습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추석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인테넷 사정으로 오늘 약간 늦었습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추리무협 #천지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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