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오르기까지
지난 2007년 여름, 유럽여행을 고민하던 대학생인 나에게 날벼락같이 떨어진 길이 바로 이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향하는 ‘카미노 프랑세즈’였다. 무지의 소치인가, 스페인어로 인사말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어찌하여 800km에 가까운 도보횡단 여행(순례)을 마음먹고 행동에 옮긴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길을 걷게 된 정말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가 스페인의 다양한 자연, 역사, 문화유산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화적 측면, 두 번째는 가톨릭의 역사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종교적 측면, 세 번째는 학생으로서 비교적 저렴한 경비로 숙식이 가능하다는 경제적 측면, 네 번째는 각국의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구공동체의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측면, 다섯 번째는 최근 유행하는 걷기 열풍과 더불어 800km를 내내 걷고 나면 건강해지겠지, 더 쉽게 살이 빠지겠지(!)라는 환상어린 희망, 그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느린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나아갈 힘을 얻는 좋은 경험이라는 기대 등….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아져 순례를 결심했다.
순례는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이미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이 터를 마련한 인터넷 공동체는 결정적으로 순례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혁혁한 도움을 주었다. 선배들의 조언을 통해 순례에 필요한 장비들을 구입하고, 일정과 계획을 짰다. 30대 여성으로서 길을 걷고 책을 남긴 김남희 씨의 에세이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여행을 시작하면 한 권은 갖추기 나름인 가이드북 하나 없이, 그저 얼기설기 엮은 정보들을 품에 안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리고 짧은 여행을 마치고 순례의 시작점인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해,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걸음을 시작하였다.
순례자 규칙들
순례길 위의 '숙소Albergue'나 성당 등에서 2유로(한화 2,600원)를 내고 순례자 ‘여권Credencial’을 발급받으면 그때부터 당신은 순례자가 된다. 그 여권은 당신이 길 위의 숙소에서 침대 한 칸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증이다. 숙소의 가격은 자유 기부제부터 평균 3~5유로(한화 4천~7천원) 선, 당신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몸 상태가 아닌 이상 숙소는 하루 이상 머물 수 없다.
입실은 숙소에 따라 다양하나 대체로 12시 이후부터 이루어지고 배정은 선착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침대가 없는 경우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자거나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로 향한다. 숙소는 기숙사 형식의 2층 침대가 늘어선 큰 방으로 남녀공용이 주를 이룬다. 다음날 아침 숙소의 ‘봉사자Hospitalero’는 당신의 늦잠을 깨우러 나타날 테니 적어도 8시 이전에는 짐을 꾸려 길 위로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낮잠Siesta' 시간으로도 유명한 뜨거운 태양을 피해 걷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길을 서두르는 것이 관례이다.
또한 이 여권에는 당신이 들르는 거의 모든 곳에서 - 숙소는 물론 식당, 우체국, 동네 상점에서까지 - 도장을 받을 수 있고, 이 도장들이 모여 당신의 순례를 증명하게 된다. 산티아고에서 시작하여 최소 100km 이상을 걷게 되면 당신은 가톨릭 교구에서 수여하는 '증서Compostela'를 받을 수 있다.
순례자의 하루
아침, 그들의 기상시간은 해도 뜨지 않은 신새벽에서 시작하여 숙소에서 내쫓는(?) 8시 사이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오후 2시 이후 길 위의 모든 상점과 관공서는 시에스타라는 달콤한 낮잠시간에 빠진다. 가뜩이나 그늘 찾기가 힘든 순례 길, 뜨거운 태양 위에서 걷는 일은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그 전에 하루 걸음을 마치고 숙소에 든다.
숙소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여권을 꺼내들고 봉사자인 오스피딸레로에게 입실수속을 밟는 것이다. 길 위에는 다양한 숙소형태가 존재한다. 보통 남녀노소의 구분 없는 방의 수많은 이층침대 가운데 한 칸을 받아 짐을 풀어 자리를 맡고, 곧바로 샤워와 빨래를 마친다. 땀에 전 온 몸을 씻고 비눗물에 몇 번 헹군 옷을 꼭 짜서 이글거리는 스페인의 태양 아래에 널어두면, 놀랍게도 옷들은 3시간이 채 안되어 바삭바삭하게 마른다.
걸으면서 많은 주전부리를 하기도 하지만, 보통 그 후 점심때엔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과 부엌에서 음식을 해 먹거나 바에 가서 ‘순례자 메뉴’라고 하는 전채요리, 본 요리, 후식으로 이루어진 평균 8~10유로(1만원~1만3천원) 대의 음식을 사 먹기도 한다. 그 후엔 달콤한 휴식시간, 낮잠을 즐기거나 밀린 일기를 쓰고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오후시간을 보낸다. 곧 해가 잠잠해지면 마을을 둘러본다.
순례 가운데 스페인의 유명한 도시들을 들르기도 하는데, 이런 날이면 볼거리가 천지라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 저녁식사를 해 먹거나 사 먹고 나면 순례자들을 위한 종교적 예식에 참석하거나, 죽이 맞은 친구들과 밤을 즐기는 등의 짧은 자유를 만끽하고, 대체로 밤 10시 정도인 폐문시간 안에 숙소에 돌아온다. 빨랫줄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고 다음날을 위해 다시 짐을 꾸리고, 침대 위에 펴 두었던 침낭 속에 들어가 잠드는 것이 순례자의 하루이다.
순례는 고행?
사람들이 보통 여행에서 떠올리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라고는 한 톨도 없이 내 마음대로 늦잠을 잘 수도 없고, 밖에서 놀 수도 없는, 뜨거운 햇빛 아래 무거운 등짐을 지고 내내 걷고 빨래하고, 밥 해 먹고 잠드는 되려 ‘일상보다 더 퍽퍽한 생활’ 아닌가? 순례는 고행이라 하던데, 여행이 아니라 고생길 아닌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행(?) 길 위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가벼운 삶의 단순한 기쁨’이었다. 길 위에서는 10kg 남짓한 등짐 말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또 하루하루 걷고 먹고 자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우아하게 나는 제비들의 날갯짓을 바라보았고, 숲길에 숨겨진 산딸기와 높다랗게 자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체리를 따서 맛나게 먹었다. 길 양편으로 곧게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의 향내를 맡았고, 자신의 두 발이 길 위에 온전히 닿아 함께인 촉감을 느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길을 향해 온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삶을 나누고 길을 함께했다. 오랜 연인과의 이별, 부모와의 사별, 삶의 권태,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깊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할퀴고 간 깊은 상처를 낫기 위해, ‘길’을 찾는 이들과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갓 세례를 받아 짐짓 진지한 체하며 심각한 모습으로 걸음을 내딛던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은 사랑을 말하지 않았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걸었고, 서로 가지고 있던 작은 과자조각과 미지근한 물병을 통해 빵을 떼고 잔을 나누며 기적을 이루었던 이천 년 전의 성찬례의 기적을 재현하였고, 물집이 잔뜩 잡힌 발, 부러진 다리뼈, 감기부터 폐렴에 이르기까지 온갖 병들을 정성스레 보살펴주었다.
물음표를 안고, 길 위에 다시 오르다
"왜?"
어째서 나는 1만 킬로미터를 날아가 서쪽 세상의 끝을 기어코 보겠다고 이 길을 걸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 길은 잘난 것 하나 없이, 땀에 찌들어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줄 것도 없는 나를 온 몸으로 끌어안아 주었던 것일까?
순례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운 물음이다. 이제 그 모든 의문을 끌어안은 채, 두 발과 온 몸으로 걸었던 길을 두 손과 기억에 의지하여 걸어간다. 길 위에서 허겁지겁 주워 담았던 돌멩이들을 꺼내어 갈고 닦아, 그때는 알지 못했던 의미를 찾아가려 한다.
나는 지금,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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