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33) 상해 임정의 망년회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18 19:38수정 2008.03.1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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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떠들며 마셨다. 모두가 어린이처럼 좋아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포식과 취기는 그들의 불치병을 다시 도져 놓았다. 향수병이었다.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르게 망향가가 선창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들 함께 따라 불렀다. 그들은 그 긴 망향가를 느릿느릿 끝까지 불렀다. 더러는 노래 중에 눈물을 닦기도 했다.     

1. 아름다운 삼천리 정든 내 고향
  예로부터 내려온 조상의 터를
  속절없이 버리고 떠나왔노니
  몽매에도 잊으랴 그리웁고나.


2. 백두 금강 태백에 슬픔을 끼고
  두록 양강 물결에 눈물 뿌리며
  남부여대 쫓겨온 백의동포들
  북간도에 눈보라 울리지 마라

3. 일크스크 찬 바람 살을 에이고
  바이칼 호수에 달이 기울 때
  묵묵히 앉아 있는 나의 마음을
  날아가는 기럭아 너는 알리라

4. 서백리아 가을달 만주 벌판에
  몇 번이나 고향을 꿈에 갔더뇨
  항소주에 봄날과 장사의 비에
  우리 님을 생각이 몇 번이던가

5. 상해 거리 등불에 안개 둘리고
  황포강에 밀물이 부닥쳐 올 때
  만리장천 떠나는 기적소리는
  잠든 나를 깨워서 고향 가자네.

6 부모 형제 생각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침상을 적실 뿐이네
  와신상담 십 년을 헤매이어도
  아아 나의 타는 속 뉘라서 알리


후렴>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고려사(寺)


봉래를 출발한 김태수와 백주원은 항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백주원을 찾던 인물이 일본 관헌이 아니라 한국에서 찾아온 민간인임을 보고받은 신규식은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혹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박찬익에게 물었다.

“대관절 18호를 찾아온 자가 누구란 말이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다만 항주 민 사장이 안심해도 될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뭐며 어디 사는 자라고 합디까?”
“한양 숭교방에 사는 김태수라고 했습니다.”

신규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숭교방에 사는 김태수라면 김인용의 둘째 아들 김태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는 상해에 오기 직전 김인용의 집에 갔을 때, 아주 예의 바른 청년으로 성장한 김태수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이는 얼마쯤 된 사람입니까?”
그들은 민필호를 불러 김태수라는 자의 외모와 연령을 물었다. 민필호는 보고 들은 대로 대답했다.
“18호를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는 청년 같습니다.”
신규식은 김인용의 아들 김태수라는 확신을 굳혔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러 바다를 건너온 것이 철없이 느껴졌지만 아무튼 그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규식은 김태수를 한 번 만나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봉래에 연락하여 두 사람에게 항주 지사로 복귀하라고 하시오.”
마침 그는 항주 지사에 한 번 들러 볼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김태수와 백주원은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산비탈 암자 마당에 평상을 놓고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바다가 어두워져 안 보이게 되면서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달빛이 서치라이트처럼 지나갔다. 환하고 힘센 달이 뜰 모양이었다. 조금 지나 샛별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정밀(靜謐)한 달빛으로 꽉 차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기도 하고 머리를 어깨에 서로 기댈 때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나온 삶과 지금의 일과 앞으로의 날들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달은 기울었고 별자리는 이동했다. 그들은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백주원은 김태수의 열정을 모두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사실 그녀는 김태수가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보기에 김태수는 다소 철없어 보이기는 해도 순수하고 화끈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무엇보다 너저분한 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런 사내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에게 열정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말을 돌려준 것이고 그의 눈빛이 황홀했다는 찬사를 써 보냈던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와의 관계는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불쑥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감동했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김태수에게는 그의 가정과 인생이 있었다.

김태수는 허리를 펴고 단소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책상다리로 앉았다. 그러고는 소리 내지 않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을 조그맣게 오므렸다. 김태수의 볼이 조금 부풀어지는 듯하더니 청아한 죽음(竹音)이 새어 나왔다. 검정색이라서 오죽(烏竹)이라고 부르는 피리였다. 그것이 하얀 모시 두루마기 위에서 들썩일 때마다 소리는 한 층씩 깊어져 갔다.

얼마 후 단소는 누군가를 부르는 애절한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처절한 소리로 높아져갔다. 백주원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아프고 아린 가슴을 눌렀다. 김태수가 단소를 멈췄다. 백주원은 김태수의 손을 가져다 자기의 가슴에 댔다. 그러고는 꼭 눌렀다. 잠시 후 그녀는 김태수의 손을 풀어 놓아주며 말했다.

“저는 심장이 조금 안 좋은 편입니다. 연주가 워낙 좋지 않고서는 제 가슴을 아프게 하지 못하는데.”
백주원은 생긋 웃었다. 김태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은 저도 조선 음악을 조금 할 줄 압니다.”

백주원은 단소는 생황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생황과 단소, 이른바 생소 병주라는 거였다. 김태수는 지금이라도 생황이 있다면 그녀와 함께 연주해 보고 싶었다.

김태수에게는 범상치 않은 욕구가 있었다. 그것은 미적 소망이라든지 예술적 원망(願望)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은 범상한 사람들에게는 없는 기질이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음을 체험하고 싶은 집착이 있었다. 그가 조선의 건축물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는 어설프거나 조악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는 어느 방면이든지 조예가 있거나 경지에 다다른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감과 존경을 품었다.

김태수에게는 꿈이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작지만 이루기 힘든 꿈이기도 했다. 그는 악기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사람의 훌륭한 목소리에는 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매료되고는 했다. 특히 춘향가 쑥대머리는 그의 혼을 빼 놓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북채잡이가 되고 싶어 했다. 물론 그런 희망은 아버지 김인용이 죽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소리를 하고 자신이 북으로 추임새를 해 보는 장면은 그에게 원형적인 욕망으로 자리 잡혀 있었다.

예로부터 2명창 1고수라 했다. 고수 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었다. 리듬 감각이란 수련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김태수의 북 솜씨는 본인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전문 북잡이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김태수는 백주원을 암자에 들여보냈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며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멀리서 바닷물 소리가 구슬피 들려오고 있었다.

백주원은 소주에 가면 항주까지 직항하는 배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말 한 필을 더 빌리기로 했다. 말은 소주(쑤저우)에 가서 반납하면 되게끔 되어 있었다. 태수는 백주원에게 황강을 타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빌린 말을 탔다. 두 사람은 한 나절 동안 산동의 평원 지대를 달려 저녁 무렵에야 소주에 닿았다. 배는 다음 날 오후에 있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황포강 #상해임정 #북채잡이 #쑥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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