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공원에 세워진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
박도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피아간 4, 50명의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결국 완전 포위당하였다. 기삼연은 최후를 각오하고 의관을 정비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출한 기삼연은 순창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쇠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설상을 받았다. 그때 적 수십 명이 들어와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기삼연은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을 해치지 말라"고 하면서 순순히 체포, 담양으로 압송되었다. 담양 군수가 거만한 언사로 농을 하자 크게 꾸짖었다.
"너는 선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왜놈의 종노릇을 이렇게 심하게 하느냐."담양에서 다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차를 메고 가는 이들이 눈물을 흘려 길이 지체되었다. 광주 감옥에 수감된 기삼연은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애초, 그의 꿈은 해를 삼키려고 한, 곧 일제를 패망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마침 김준은 창평(昌平)에서 일군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을 추격하다가 기삼연 의병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정병 30명을 이끌고 탈환하고자 추격하였으나, 이미 경무서에 수감된 뒤였다. 일군들은 요시다 이하 다수의 일병이 사상한 것에 대한 복수로 기삼연을 무수히 난자하였으며, 결국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시신이 너무 참혹하여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뒤에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어 염하여 서탑등(西塔嶝)에 임시 매장한 뒤 목비(木碑)를 세우고 '호남 의병장 기삼연'이라고 썼다.
기삼연 의병장 사후에는 그의 산하에 있었던 부장들이 독립된 의진을 형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호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준(김태원) 전수용(전해산) 이석용 심남일(沈南一) 김봉규 박도경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지휘 하에서 전략을 수행하다가 검거되어 형을 받은 인물들로 박도경(朴道京, 道慶) 김공삼(金公三, 奉奎) 이중백(李仲栢)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며, 그밖에 오성현(吳成玄) 박재두(朴在斗) 등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 장성향토사연구회의 <장성의 맥>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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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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