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에서 목욕하고 창의문을 통과했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36]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다

등록 2008.04.22 16:48수정 2008.04.23 08:19
0
원고료로 응원
a

계곡. 삼각산 비봉 골짜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홍제천으로 연결된다. ⓒ 이정근



얼마쯤 걸었을까? 모래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한 의미의 모래내가 끝나고 홍재천의 시작점이었다. 한씨는 발걸음을 멈추고 흐르던 물이 모래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래 속에 스며들어간 물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강물이 가까워 오면 다시 표면으로 솟아올라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겠지. 나도 저 물처럼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한씨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는 비웃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씨는 별빛을 초롱불삼아 하염없이 걸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수량도 많았고 흐르는 물에 곱게 수마(水磨)된 바위들이 있었다. 한씨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작정 걸었다. 동쪽에 떠있던 달이 중천에 걸린 것으로 보아 야심한 시간이다. 자시가 지난 것 같았다.

a

소나무. 깎아지른 절벽에 소나무가 있다. ⓒ 이정근



눈앞에 자그마한 정자가 보였다. 한씨는 정자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깎아지른 절벽아래 펑퍼짐한 마당바위였다. 한씨는 절벽을 쳐다보았다. 갈라진 틈바구니에 소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름 없는 소나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대부집 딸로 태어난 나는 지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다."

바위에 앉아 두 팔에 얼굴을 묻은 한씨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광해 임금을 치기로 결의하고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지?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사대부들이 그런다. 군자는 불사이군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입으로는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이 불충이라 말하면서 살아있는 임금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우자는 역적모의를 하고 칼을 씻으면 용서 된다구?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삼각산과 백악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은 깊고 물이 좋았다. 송림사이로 병풍을 두른듯 한 기암절벽은 절경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연산군이 수각을 짓고 세월을 낚았던 곳이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이귀와 김류는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기다 모사를 꾸몄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원군을 옹립하자고 칼을 뽑아 결의했다. 비밀을 지키자며 흐르는 물에 칼을 씻었다. 

이들은 광해의 친속 이서와 신경진을 규합하여 거사에 나섰다. 그들이 동원한 군대를 의병이라 칭했고 창의문을 부수고 도성에 진입하여 창덕궁을 장악했다. 반정에 성공한 그들은 계곡에 정자를 짓고 후일담을 나눴다. 이이반의 고변으로 추국청이 설치되는 위기를 모면한 것은 하늘이 도왔으며 사나이의 으뜸 덕목은 비밀 유지라며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지었다.

a

창의문. 인조반정군은 창의문을 통과하여 도성에 진입했다. 이후 역모에 노이로제에 걸린 인조는 창의문을 폐쇄했다. ⓒ 이정근



고개를 번쩍 든 한씨는 주저 없이 옷고름을 풀었다. 어깨위에 별빛이 내려앉았다. 상아를 깎아놓은 듯한 귀밑선이 아름다웠다. 치마를 내렸다. 달빛이 한씨의 속살에 내려앉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위에 서 있는 한씨는 "자 보아라. 깨끗하지 않느냐?" 내려다보고 있는 달님에게 항의하는 것만 같았다.

한씨는 자그마한 소(沼)에 몸을 던졌다. 차가웠다. 삼각산 비봉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한씨는 몸을 박박 문질렀다. 자갈을 주워 피부에서 피가 흐르도록 미친듯이 문질렀다.

목욕을 마친 한씨가 바위로 다시 올라왔다. 물에 젖은 한씨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굴을 감싸 쥔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세상이 미쳤다. 미치지 않고선 이럴 수 없다. 훌훌 벗고 달밤에 몸을 씻는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단 말이다. 세상이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미쳤단 말인가? 나는 미치지 않았단 말이다."

물이 흐르는 그녀의 살갗에 피가 흐르고 그 위에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과 눈물과 피가 범벅이 된 그녀의 피부가 별빛에 번들거렸다. 바람이 분다. 물기 젖은 그녀의 나신이 눈부신 듯 달님마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에선가 새벽 예불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물안개가 피워 오르고 동녘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한씨는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민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였다.

세검정 주변에는 장판을 만들어 시전에 내다 팔거나 종이를 만들어 관가에 납품하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종이를 만드는데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장인들이 모두 잡혀가고 도망갔던 장인들이 돌아와 겨우 명맥을 이어왔으나 이번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a

안평대군.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발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한씨는 터벅터벅 걸었다.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발걸음이 이랬으리라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소는 끌려가지만 나는 내 발로 걸어가잖아."

스스로 자위해 보았지만 공허했다. 한씨는 실없는 웃음을 날리며 걸었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 바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부침바위였다. 혼례를 올리고 3년. 한씨는 태기가 없었다. 자하문 밖 바위에 돌을 부치고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 한다는 바위가 있으니 가보라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찾아갔던 바위다.

납작한 돌을 구해 스물두 번 자신의 나이만큼 문지르다 손을 놓았을 때 신기하게도 돌이 바위에 붙었다. 붙었다라기 보다도 움푹 파인 곳에 얹혔다. 기도가 통했을까. 한씨는 그 후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고개 넘어 도성에 있다.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한씨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언덕길이 나왔다. 이제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한참을 오르니 오른쪽에 누각이 있었다. 무계정사(武溪精舍)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둘째 형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을 때 안평대군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은둔했던 별장이다.

한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형이 보낸 군졸들에게 붙잡혀 강화도로 떠나던 안평대군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세검정에서 칼을 갈았던 자들이나 안평을 강화에 유배 보내 사사시킨 자들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합리화에 달인인 것만 같았다. 자기 욕심은 옳고 자기 생각은 모두가 정당하다는 사대부들이 사는 나라. 그 사대부 중의 하나가 자신의 지아비라고 생각하니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a

창의문. 훗날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 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마루턱에 올라섰다. 비로소 도성의 바람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얼마나 맡아보고 싶었던 한성의 냄새인가. 인왕산과 백악산 골안개에 묻힌 누각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의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반란에 시달리던 인조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군사를 풀어 숙위하던 문이다. 그러나 문을 지키던 군졸은 없고 문짝은 떨어져 있었다.

창의문을 통과한 한씨는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자두꽃 향기가 코 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향긋한 내음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한달음에 장동 집에 도착했다. 아들이 있고 지아비가 있는 집이다. 심양에서 1700여리. 머나먼 길을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문을 밀치고 뛰어들고 싶었다. 허나, 솟을 대문 앞에 선 한씨는 대문을 밀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문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용했다. 마당에는 밤새 내린 눈처럼 감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목걸이를 만들어 아들의 목에 걸어주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홍제천 #세검정 #무계정사 #부침바위 #창의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게 뭔 일이래유"... 온 동네 주민들 깜짝 놀란 이유
  2. 2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3. 3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4. 4 이시원 걸면 윤석열 또 걸고... 분 단위로 전화 '외압의 그날' 흔적들
  5. 5 선서도 안해놓고 이종섭, 나흘 뒤에야 "위헌·위법적 청문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