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50] 33인이 민족대표라고?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4.23 18:52수정 2008.04.2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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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존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을 더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적합한 칭호를 매겨야 한다. 유대의 독립 운동가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빌라도의 것은 빌라도에게"라고 말했다. 그들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 대표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 자신도 그런 칭호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할 것이다.

3·1운동의 주체는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탄압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이란 용어에도 다소 문제가 있다. 한국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그리고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일본 헌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그 뭉친 이 중에서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동학란이 아니라 갑오농민혁명이라면, 그러므로 3·1운동은 '기미평민항쟁'쯤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닐지 몰랐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미국에 처음 보도된 것은 3월 13일의 일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발표가 왜곡 축소되었음을 지적한다.

북경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조선 소요는 일본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격렬하다. 이제는 조선 전역에서 모든 계급이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일본 관헌은 3월 3일 고종 황제 국장 날 소요가 일 것에 대비하여 조선 각지의 헌병을 경성으로 이동 배치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선수를 써, 3월 1일을 기하여 일제히 독립 시위를 전개했다.

허를 찔린 일본 측은 크게 당황했지만 즉각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들은 수천의 시위 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일본 관헌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기독교 중학생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들은 학생들의 옷을 난폭하게 벗겼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처럼 그들도 고통 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이제 일본인은 운동이 진압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선의 전 국민을 격분 속에 몰아넣은 결과가 되었다. 우리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조선에게 일정한 조건으로 독립을 부여할 것을 절실히 바란다. 그 조건이란 조선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로이터 통신>은 '조선 독립 소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라는 제하의 보도를 세 차례에 걸쳐 타전했다.


로이터 3일 북경 발 소식 : 3월 29일 평양 소식에 의하면 사태가 평정되었다고 한 지 두 주일이 지난 3월 27일에도 군중들의 집회는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28일에도 한국인들이 집합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은 군중들에게 전단을 배포하여 윌슨 대통령에게 탄원할 것을 호소했다. 전단은 윌슨 대통령이 한국인들의 요구를 귀담아 듣고 조선 문제를 평화 회의에 상정하여 토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군경은 이 전단을 보고 주모자의 자택을 수색했으며 680명을 감옥에 넣고 123명을 경찰서에 구치했다. 그 중 남학생이 40명 여학생이 20명이나 된다. 경찰서에서는 감옥에서보다 더 혹독하게 한국인들을 취조했다.

로이터 4일 북경 발 소식 : 조선에서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3월 29일 한국인들의 소요가 등주(음역)에서 일어나 111명이 살해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일본 군경은 한국인 40여 명을 역전으로 끌고 가서 목만 내놓게 한 채 생매장했다. 가족들이 시체를 확인하려 하면 무조건 구타했다. 이 지역의 심씨라는 의사가 부상자를 치료하려 하자 경찰은 그를 총개머리로 치고 구속했다. 한 학교는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한 교회당도 소각되었다. 소식통에 의하면 다른 지방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외국 적십자회에 협조를 바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로이터 29일 서울 소식 : 서울 도처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동대문의 국립공업학교가 불에 탔고 지난주에는 남문 밖의 8곳에서 화재가 났다. 이곳은 모두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인들의 저택이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서 더욱 조선인의 미움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4월 17일, 하얼빈에서 발간되는 <노워스치즈니>지는 재 경성 통신원의 보도를 실었다.

한국인 희생자 수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일본 정부가 왜곡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신사들의 보도를 종합한 우리 숫자는 진실에 가깝다고 여긴다. 소요는 범위가 광대하고, 일본 군대의 잔학상은 극에 달했다. 총살된 사람, 찔려 죽은 사람이 3730여 명이며 부상 후 사망자는 4500명 이상이다. 또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다수일 터이다. 체포 수감자가 2만이 넘는다. 학살당한 한인들은 전혀 무장하지 않은 채 태극기로 만든 종이 모자를 쓰고 독립 만세를 불렀을 뿐이었다. 죽은 사람 중에는 부녀자도 있었고 백 명 또는 천 명이 집단 학살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초 일주일 동안 파괴된 교회만 15곳이었다.

배반의 영혼

김태수와 민필호는 한 달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상해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들은 항주와 광동을 거쳐 멀리 운남까지 다녀왔는데 주로 바닷길을 이용했다. 그들은 약 8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의 대부분이 상해 신규식의 추천으로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광동성이나 운남성에서는 동제사 회원이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학생 입학을 허용하고 있었다.

민필호가 말했다.

"예관 선생님의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하시군요."

학생들은 모두 일본과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운남군관학교 이범석은 구체적으로 독립군과 합류할 계획까지를 세워 놓고 있었다. 그들은 국내에 거사가 생기면 1학년 학생만 제외하고 모두 김좌진의 독립군 부대인 북로군정서에 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동중국해의 바다는 출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세고 차가운 날씨였다. 굼실거리는 물결 때문인지 배가 많이 흔들렸다. 객실에서 이미 적지 않은 술을 마신 그들이었다. 임무를 끝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많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상해가 가까워지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취한 두 젊은이의 머리를 쇄락하게 만들었다.

민필호는 김태수가 뭔가를 물은 것 같았는데 배의 기관 소리와 바람결에 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민필호는 김태수에게 방금 무슨 말을 했냐고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김태수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사납게 얼굴을 때렸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시작했다.

"필호야!"
"네!"
"너 경성에 갔을 때, 숭교방 김인용의 집도 들렀다고 했지?"
"맞아요."
"내가 김인용의 아들인 거 몰랐지?"
"뭐라고요?"
"그러니까 그 집 며느리의 남편이란 말이다."
"아, 그렇다면 최도애의 남편이라고요?"
"그렇다니까. 너 그 날 밤 술 많이 먹었다고 했지?"
"그래요."
"백주원이 그러는데 너 최도애와 잘 아는 사이였다며?"
"그럼요 약혼했었거든요."
"최도애와?"
"네."
"내 마누라와?"
"그렇다니까요."
"잘했다."
#33인 #민족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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