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모덕사
"내 머리를 잘라도 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라는 이 말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새로이 조직된 김홍집 내각이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에 면암이 불복 상소문에 나온 말로, 이기백 선생의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글 첫머리에 인용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동안 국어 교과서가 여러 번 개편되었지만, 이 글은 한 번도 빠짐없이 실렸다. 그만큼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명문(名文)이다. 나는 이 글을 학생들에게 30여 년을 가르쳤으니 최소한 백번은 반복 학습한 듯하다.
면암인들 거대한 개화의 물결에 당신의 항거가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기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덤빔)인 줄 왜 몰랐겠는가.
그러면서도 목숨까지 바치며 항거한 것은 우리의 근본정신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후세들에게 주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귀감으로, 겨레의 제단에 당신을 오롯이 바친 것이다.
나는 학문도 얕고 전문 역사학도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10여 년째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의병 유적지를 더듬는 것은 뒤늦게나마 우리 역사를 배우고자 함이요, 지난날 미처 몰라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함을 뒤늦게 뉘우치면서, 배우고 깨우쳐 숨겨진 바른 우리의 역사를 추수지도하고자 함이다.
2007년 10월 20일, 오직 열정 하나로 호남의병전적지 답사 순례 길을 떠났다. 의병 후손들의 길 안내를 받으며, 한편으로는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써놓은 문헌들의 책장을 넘기면서, 역사의 기록을 확인하고 후손이나 향토 사학자에게 지난날의 증언을 듣는 배움의 길이었다.
호남 들판에 불을 지핀 인물지금까지 알려진 사실 가운데 을사조약 체결 이후 사실상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첫 도화선이 된 것은 1906년 최익현의 의병봉기였다. 최익현은 전직 관료이면서 당대 척사파(斥邪派 위정척사파의 준말로 주자학을 지키고 서양의 세력을 물리치자는 학파)의 거두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삼남의 각 지역에서 서로 호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독자적인 의병봉기를 기도하였다. 이때 최익현의 거의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태인의 임병찬(林炳瓚)이었다. … 최익현 의병부대는 6월 4일 무성서원의 강회를 기화로 봉기하여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홍순권 지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88~89쪽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태인에서 처음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최익현과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열흘 동안 활동하다가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