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67] 단말마의 외침, 정부! 정부!

김갑수 역사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편

등록 2008.06.04 12:30수정 2008.06.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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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한 민필호

신규식은 손중산과의 회담장에 민필호를 대동했다. 중국 측에서도 외교부장이 합석한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총통에게 예를 표하고 총통이 먼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총통과 외교부장 오정방이 앉자 신규식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민필호는 멀뚱히 서 있었다. 오정방이 손으로 민필호에게 앉기를 권했다.

민필호가 엉거주춤 앉자마자 오정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빠른 영어로 물었다.

“귀국의 정부는 이미 수립되었는데 그렇다면 수도는 어딘지요?”

민필호는 이윽히 오정방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오정방보다 훨씬 느린 영어로 대답했다.

“폐국의 수도는 여전히 서울입니다. 지금은 비록 일본에 점령당했지만 여전히 수도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해는 단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신규식은 손중산에게 민필호를 소개했다.


“우리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나갈 젊은 인재입니다.”
“신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고요.”

손중산은 이미 민필호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신규식은 조금 머쓱해졌다.


“지금 중국 교통부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암호 해독의 전문가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앞으로 우리 중국을 위해서도 큰일을 하시겠군요.”

호혜조약 5관 제시하는 신규식

신규식은 손중산에게 임시정부에서 기초한 호혜조약 5관(款)을 제시했다.

1. 한국 임시정부는 호법정부가 중화민국의 정통 정부임을 인정하며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2. 중화민국 호법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함.
3. 중화민국 군관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수용해 줄 것을 요청함.
4. 차관 500만원을 요청함.
5. 조차 지대를 지정하여 한국 독립군 부대 양성에 도움을 주기를 요청함.

손중산은 머리를 끄덕이며 서류를 읽었다.

“중한 양국은 같은 문자를 쓰는 동족에 속하며 본래부터 형제 국가로서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가 마치 서구의 미국·영국과 같습니다. 한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시아 정세는 균형을 잃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평화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필호는 눈을 반짝이며 총통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신규식도 긴장된 표정으로 총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국 임시정부를 응당 동정하고 승인해야 합니다. 호법정부는 한국의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해 소속된 각 부처 군관학교에 명령을 내려 돕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벌작전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나라가 아직 통일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광동성만의 역량으로는 한국 정부의 요망을 다 충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차관 및 지역 차용 등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은 우리가 무창을 탈환해 정식 정부를 수립한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며칠 뒤 호법정부는 한국 임시정부 특사 접견 의식을 정식으로 거행했다. 이것은 그들의 북벌 결의대회와 겸해서 치러졌다. 손중산은 중화민국 비상 대총통의 자격으로 신규식이 제출한 국서를 받았다. 양측은 서로 축사를 나누고 공식적 승인을 거친 외교 관계를 확정한 것이었다.

신규식은 손중산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 손 대총통 각하의 공식 접견을 받은 것은 비록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지만 그 의의는 아주 큽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가장 큰 일을 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가 중국에 온 뒤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소

비록 약식이라고 해도 임시정부가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일대 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암담했던 독립운동의 전도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트인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참혹하였다. 그들이 기뻐할 시간 여유도 없이 안팎으로 시련은 찾아 들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연장자, 프린스턴의 학력, 국내에서의 투옥 경력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이것 말고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는 점, 그가 미국 대통령 윌슨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주위 사람에게 인식시켰다는 점 등이 더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파리 행 비자 하나도 내지 못했다. 윌슨과의 친분 관계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불성실한 것이 사실이었다. 문제는 이승만에 대한 반발이 임시정부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었다.

신규식은 1922년 3월 20일 국무총리 자격으로 의정원에서 행한 시정 연설에서 위임 통치를 반대한다는 명백한 입장을 표명했다. 사실 신규식이 리더가 되어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냈다. 호법정부의 승인, 중국 군사학교의 한국 학생 수용, 태평양회의에 독립요구서 발송, 영일 동맹에 대한 항의(실제로 태평양회의에서 영일동맹은 미국의 요구로 폐기되었다.) 등이었다.

단말마의 외침, 정부! 정부!

신규식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밤낮 없이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들은 하나둘 껍질을 벗어 보이며 그의 희망을 무산시켰다. 게다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불화와 내분은 지칠 대로 지친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사실 한국만큼 독립운동의 전개가 빨랐으며 활력적인 나라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의 시작은 합병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독립운동가의 숫자 또한 최소한 만 수천을 헤아렸었다. 그러나 숭미주의자들의 편협한 사고와 공산주의자들의 경직된 의식이 독립운동가 진영의 불화와 내분을 끊임없이 조장한 것이었다.

미국 등 열강이 주도하는 태평양회의는 중국 호법정부에게 대표권마저도 주지 않았다. 전쟁 때에는 세 불리기를 위해 호법정부를 자진해서 연합군에 넣었던 그들이 전쟁에 승리하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중산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러니 한국의 입장은 더 처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대표는 회의 참석조차 거부당하고 말았다.

신규식을 더 절망케 한 것은 손중산의 몰락이었다. 무창만 탈환하면 대대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돕겠다던 손중산은 약속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진형명에게 밀려 다시 상해로 퇴각한 것이었다. 손중산이 북벌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켜 총통관저를 폭파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반란으로 인해 한·중 두 나라의 혁명사업은 좌초한 거나 다름없었다. 중국 통일의 날이 한국 독립의 날이라고 농담처럼 되뇌곤 했던 신규식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력 인사들이 하나 둘씩 상해를 떠나기 시작했다. 상해를 가장 먼저 등진 사람은 이광수였다. 그는 국내로 가 조사를 받은 후에 예상과 달리 쉽게 풀려났다. 이후 그는 독립 운동이란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더니, 김성수가 운영하는 동아일보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박은식과 신채호와 안창호도 상해를 떠나 제갈 길을 선택했다.

급기야 신규식은 쓰러졌다. 민족 해방은 이제 기약할 수 없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었다. 억울함과 분노가 그의 심사를 옥죄었고 비애와 절망이 그의 내부에 차고 있었다. 그는 삶의 의욕을 급격히 상실해 갔다. 게다가 병마는 그를 실제적인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는 사람을 구별해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만 멍에를 벗고 싶었나 보았다. 그는 투약과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에 어른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했다.

“나는 잘못이 없네. 나는 잘못이 없네. 하지만 나는 가려고 하네. 다시 만나세. 임시정부를 부탁하네.”

동지들이 달려와 흐느끼는 소리를 그는 먼 언덕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들었다.

그로부터 그가 허락한 것은 물 몇 모금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처참하게 야위어갔다. 그는 보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귀신처럼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 단말마의 비명은 아주 모호해서 아무도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부, 정부!”

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비명을 지른 그는 즉각 몸을 눕히더니 43년의 이승과 작별하며 영구히 잠들어 버렸다.

그는 상해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천여 명이 참석했다. 아내 조정완과 딸 신명호는 물론 백주원과 민필호도 베옷을 입었다.

중국 신보는 ‘한국 지사 신규식 상해에서 작고’ 제하의 기사를 5단으로 크게 보도했다.

국문통신사 소식: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거처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규식 총리가 4월부터 몸이 불편하여 신경쇠약증에 걸렸는데도, 국사에 대해 너무 마음을 아파한 나머지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있었는데, 건강으로 인하여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면서, 의사가 권하는 약도 받지 않았고. 이 달 초부터는 아예 음식까지 전폐하였다. 그는 이렇게 보름 이상을 지속해 오다가 어제 밤 9시에 거처하고 있던 집에서 작고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송중산 #신규식 #위임통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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