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거덜낸 위인 "차라리 죽어야지, 살면 뭐해"

[역사소설 소현세자 59]고국으로 돌아가는 길

등록 2008.06.10 17:57수정 2008.06.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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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관. 세자관으로 알려진 심양 아동도서관. 최근에는 다른 곳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 이정근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세자관. 이른 새벽부터 세자관 관원들이 분주하다. 덩달아 노복들의 발걸음도 부산하다. 문 밖에는 붉은색 가마 2대가 대기하고 있고 청나라 예부에서 나온 사람들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하! 채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빈객 박노가 아뢰었다.

"빈궁도 준비가 끝났다더냐?"
"네. 빈궁마마를 모실 시녀도 준비했습니다."
"그럼 출발 하도록 하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자빈의 옷

소현이 집무실을 나섰다. 가마가 대기하고 있는 대문을 향하여 정원을 걷는 그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다. 평소에 입는 옷이 아니다. 붉은색 예복이었다. 임금이 입는 곤룡포와 비슷했으나 군왕을 상징하는 문양도 없고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강빈 역시 붉은색 옷이었다. 세자빈이라면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하는데 조금은 어색했다.

소현이 가마에 오르자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앞에 백마를 탄 청나라 군사가 팔기군 깃발을 펄럭이며 앞장을 서고 아홉 필의 검은 말이 길을 선도했다. 소현이 탄 가마는 익위사 관원이 에워쌌고 강빈의 가마는 4명의 시녀가 뒤따랐다. 이윽고 가마가 황궁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피파박시가 맞이했다.


"황제께서는 세자의 예가 끝나면 동이 트는 시간에 맞추어 출정식을 하고 서쪽 전선으로 떠나야 하오."

이른 새벽부터 번거롭게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소현의 세자책봉식은 출정식이 있기 직전, 막간의 시간에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일조량이 적은 자연 여건상 태양을 중시하는 만주족은 일출 시간을 신성시 했고 모든 일은 일몰 전에 마무리 했다. 해가 떨어지면 하던 일도 손을 놓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오늘날에도 동북3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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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전. 심양황궁의 정전으로 각종 의식이 거행되던 곳이다. ⓒ 이정근



대정전 황제의 자리에 홍타이지가 앉았다. 두 줄로 도열한 예부 관원들 맨 앞자리에서 범문정이 고명을 읽어내려 갔다. 단 아래 읍하고 서 있는 소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리도 멀었지만 청나라 말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는 올라오라는 예부 관리의 안내에 따라 소현이 단 위로 올라갔다. 단위에 오른 소현이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췄다. 앉아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명을 내려 주었다. 소현이 두 손으로 받들었다. 그 순간 고명에 부왕의 얼굴이 겹쳐져 왔고 마음은 고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끝났다. 세자책봉식은 번개 불에 콩 튀어 먹듯이 끝난 것이다.

청나라 사신을 황제처럼 받드는 조선의 신료들

청나라 사신 만월개가 돌아가는 날. 모화관에서 송별연이 베풀어졌다. 병석에 누운 임금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대소신료들이 대거 참석했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종실과 대신 이하 문무백관들이 모두 일어나 도열했다.

"전하께서 옥체가 편치 못하신 지 오래되어 온 나라가 허둥거리는데 동궁과 대군이 이역에 머물러 계시니 더욱 답답합니다. 세자저하를 보내 주십시오."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그대들의 뜻을 황제께 전하겠소."
만월개의 목이 뻣뻣해졌고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조선에게 황제는 따로 없었다. 사신이 황제 노릇을 했고 대소신료들은 그를 황제처럼 받들었다.

"망극하옵니다."

목소리가 모화관을 진동했다. 송별연을 마친 대소신료들이 만월개가 타고 갈 가마 양 편으로 줄지어 섰다. 만월개가 거들먹거리며 붉은색 가마에 오르자 가마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열해 있던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만월개의 가마가 무악재고개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전송했다.

청나라 사신이 떠난 다음날. 심양재신 박노가 보낸 장계가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세자 책봉례를 행하였습니다. 고명은 별지(別紙)에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같은 날, 평안감사가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평양과 상원 그리고 강서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예조로 하여금 향축을 내려 보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라 명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혼절이다. 청나라 사신에 대한 정신적인 부담과 세자책봉이라는 충격이 그를 무너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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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창덕궁의 서문으로 대소신료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현재는 출구로 사용하고 있다. ⓒ 이정근


대궐이 뒤집어지고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 임금이 혼절했다니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전갈을 받은 종실과 대소신료들이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궐문을 지키고 있던 승지 구봉서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표신을 휴대하지 않은 사람은 들여보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약방제조와 어의가 금호문 밖 땅에 앉아 있고 최명길을 비롯한 재상들이 차비문 밖에 앉아 있었으나 궐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하! 정신을 놓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급히 침전으로 옮겨진 인조 머리맡에서 소원 조씨가 울부짖었으나 임금은 말이 없었다.

"지금 전하의 환우가 어떠하시냐?"

옆자리를 지키던 의원 이형익에게 물었다, 당황한 낯빛이다. 하지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누워있는 임금을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한 곳으로 모았던 기가 흩어지며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열담(熱痰)이 상승하여 급히 약방으로 하여금 죽력(竹瀝) 두 사발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죽력을 드시면 눈을 뜨실 수 있겠는가?"
소원에게는 눈이 핵심이었다. 눈을 뜰 수 있느냐? 영원히 감아 버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걸리실 것 입니다."

"차도가 아니라 꼭 눈을 뜨셔야 한다."
소원의 목소리는 꼭 눈을 뜨게 해달라는 애원이었다.

어의도 아닌 의원에게 마루타가 된 임금님

이형익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조가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으나 삼음교에 집중적으로 놓은 침이 마음에 걸렸다. 누워있는 임금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어나 앉아 있게 하라는 소원의 하명에 따라 부족하면 보(補)하고 넘치면 사(瀉)하라는 기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삼음교에 놓는 침은 다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하반신을 마비시켜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형익이었다. 그렇다고 지엄하신 옥체를 상대로 마루타 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목이 열 개라도 할 수 없었다.

임금이 쓰러져 혼수상태를 헤매고 있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궁궐 담장을 뛰어넘은 소문은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고 조선 팔도로 날아갔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산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칠패시장과 애오개 시장에 밀려든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했다.

"차라리 죽어야지, 백성들 이렇게 못살게 해놓고 지눔들만 살면 뭐해?"

"맞어, 맞는 말이야. 쥐뿔도 없는 게 그놈의 명나란가 맹나란가만 붙잡고 대들었다가 나라는 거덜 내고 지금 뭐하는 것 인줄 모르겠어? 졌으면 졌다 하고 제 살 궁리를 하던지 허구헌날 선물 꾸러미 꿰어 바치며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니 한심하다 한심혀."

"그렇다고 임금님을 그렇게 욕하면 되나?"

"나랏님도 없는 자리에서는 욕한다고 그랬어. 잡아가려면 잡아 가래지. 하나도 안 무서워. 살기 폭폭 한데 순군옥 가막살이가 더 났지."

"그러면 들어가 살지 왜 여기에서 장사하고 그런가?"

"들어가 살고 싶어도 심양에 잡혀간 마누라가 돌아와 날 못 찾을까봐 걱정돼서 그러네."

전쟁으로 삶이 피폐 해진 백성들은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소현세자 #심양 #강사포 #적의 #금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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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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