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음모에 휘말린 대필작가의 선택은?

[서평] 로버트 해리스 <고스트 라이터>

등록 2008.06.13 09:35수정 2008.06.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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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목록을 눈여겨보라. 그중 얼마나 많은 것이 유령들의 작품인지 알면 아마 놀라 자빠질 것이다. 논픽션에서 소설까지 모두. 우리는 디즈니월드의 숨은 일꾼처럼 출판계를 지탱하는 그림자 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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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책 표지 ⓒ 랜덤하우스

<고스트 라이터>에서 주인공이 푸념하듯이 늘어놓는 말이다. 여기서 '유령'이란 존재는 바로 '대필작가'를 말한다.


대필작가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을 대신 써주고 그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 글이 책으로 출간되더라도 대필작가의 이름은 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공저자로 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물며 그 책의 출판기념회에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쓴 글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자리라면, 대필작가도 참석을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글자 그대로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고스트 라이터>의 주인공도 대필작가다. 주인공이 전문으로 대필하는 분야는 자서전 또는 회고록이다. 70년대 록스타의 자서전을 대필했고, 그 책은 영국에서만 30만 부가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다. 물론 그 자서전은 그 록스타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유령이지만, 그 바닥에서는 나름대로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주인공은 "자서전을 씁니다"라고 대답한다. 상대방은 "요즘은 개나 소나 자서전을 쓰는군요"라는 반응을 보인다. 대필이라는 것이 돈벌이가 얼마나 잘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자랑스럽지는 못한 일이다. 주인공은 왜 하필이면 이런 대필작가가 되었을까?


이 직업에도 약간의 매력이 있다. 잠깐이나마 다른 존재가 되는 자유. 그건 전율을 만끽할 수 있는 삶이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이 요구된다. 타인에게서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고, 추상적인 그 삶에 살을 붙이고 피가 돌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깨닫지 못한 삶을 대필작가들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배우가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것과 언뜻 비슷하지 않을까. 대필작가에게 직업의식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테다.


어느날 엄청난 제안을 받는 대필작가

역사추리소설로 유명한 작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가 <고스트 라이터>에서 난데없이 배경을 현대로 옮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대필작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필작가의 애환이나 서러움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스트 라이터>는 대필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정치스릴러 소설이다.

'대필작가'라는 신분, '유령'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인공을 "이봐" 또는 "자네"라고 부를 뿐이다. 주인공은 어느날 전 영국 총리의 회고록을 대필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이 제안을 한 회사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출판사다. 전 수상은 재임 기간 동안 테러에 강경하고도 단호한 자세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주인공에게 대필을 부탁하면서 조건을 제시한다. 한 달 안에 끝낼 것. 대 테러 전쟁에 대해 가차 없이 까발릴 것 등이 그 조건이다. 주인공이 그 대가로 받는 보수는 엄청나다. 매주 5만 달러씩 총 20만 달러를 받고, 기간 내에 일을 끝내면 특별 보너스로 5만 달러를 더 받는다. 그리고 집필에 필요한 생활비와 각종 경비는 별도로 지급한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눈이 돌아갈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큰 돈을 지급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위험에 빠지거나 어떤 음모의 희생이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전 영국 총리라면 테러범들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주변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출판사와 계약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는가 하면,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하고 감시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 총리와 인터뷰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 총리는 흔쾌히 취재요청에 응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들과 모아놓은 자료들 간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 과거를 제대로 기억 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히 미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기의 과거를 조작한다면? 그리고 대필작가가 그 사실을 알아 버렸다면?

진실을 밝힐까? 거액을 받을까?

전 총리의 회고록을 대필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도 정치판에 한발 들여놓은 셈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고민은 더욱 커져만 간다. 대필작가의 불문율과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이, 전 총리 주변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사건은 주인공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던 대필작가가 영문도 모른 채 엄청난 음모에 휘말려들어가는 순간이다.

주인공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 결국에는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해서 맡은 일을 끝내고 돈을 챙기는 것. 이 두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대필작가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의 글로 재구성하지만, 막상 그 책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자신의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이 그의 목소리인지 알지 못한다.

대필작가의 난관이 여기에 있다. 언젠가는 자신을 떳떳하게 밝히고 싶지만, 그 순간 작가로서 자신의 삶은 끝장날지 모른다.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순간, 더 이상 작가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다.

<고스트 라이터>의 주인공은 하필이면 거물 정치인의 회고록을 대필하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이런 문제를 느꼈을 것이다. 총리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음모를 꾸미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을까.

굳이 총리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밝히고 싶지 않은 한 두 가지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산다. 모든 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미스터리나 마찬가지다. 대필이건 아니건 다른 사람의 그런 삶을 글로 정리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 안에서 커다란 비밀이 발견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삶을 글로 쓰고 '대필'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 것도 안전한 한가지 방법이 될지 모른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호기심을 억눌러야 하고, 절대로 진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집필하는 작가가 아니라 집필을 도와주는 '유령'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고스트 라이터> 로버트 해리스 지음 / 조영학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덧붙이는 글 <고스트 라이터> 로버트 해리스 지음 / 조영학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고스트 라이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3

로버트 해리스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고스트 라이터 #로버트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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