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털기 (36) 기억

[우리 말에 마음쓰기 349] ‘나르다-옮기다’와 ‘운반’

등록 2008.06.24 13:26수정 2008.06.2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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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기억

 

.. 언니는 자기가 10년 동안 무얼 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  <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살림,2005) 5쪽

 

“10년(年) 동안”은 “열 해 동안”으로 손봅니다. “남는 것이 없다고”는 “남아 있지 않다고”나 “남지 않았다고”로 다듬습니다.

 

 ┌ 기억(岐억) : 어릴 때부터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다

 ├ 기억(記憶) :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   - 기억에 오래 남다 / 기억을 불러일으키다 / 예전의 기억이 희미하다 /

 │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

 │     바로 그때 한 줄기 빛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

 ├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 하나도 안 떠오른다고 했다

 └ …

 (‘岐억’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억’도 한자인데 코드표에 없어서 안 뜨는지, 아니면 토박이말인지, 아니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쓰지도 않는 한자말이 많이 실린 우리 나라 국어사전입니다. ‘岐억’이라고 적은 한자말도 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말을 어느 곳에서 누가 쓴다고 국어사전에 실었을까요. 쓰임새가 적더라도 꼭 실을 만한 낱말이라면 올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岐억’ 같은 말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쓸 만하며 어느 자리에 쓸 만하고 누가 쓸 만한 낱말인지요.

 

예전에 겪거나 알고 있던 이야기를 더듬어서 생각해 내는 일을 ‘기억(記憶)’이라고 한답니다. 이 말은 꽤 널리 씁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듬지 않아도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다-떠올리다(떠오르다)-되새기다-돌아보다(되돌아보다)’ 같은 말을 넣어도 잘 어울리곤 합니다. “기억에 오래 남다”는 “머리에 오래 남다”로, “기억을 불러일으키다”는 “옛 생각을 불러일으키다”로, “ 예전의 기억이 희미하다”는 “예전 일이 어렴풋하다”로, “기억이 없으신 모양이군요”는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군요”로,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는 “머리를 스치는 예전 생각이 있었다”로 다듬어 볼 수 있어요.

 

 ┌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 하나도 모른다

 ├ 모두 잊었다

 └ …

 

‘기억’이라는 낱말을 그대로 쓴다고 해서 잘못되거나 나쁠 대목은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조금씩 살짝살짝 가만히 마음을 기울여 준다면, 여러모로 한결 살갑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말을 한껏 북돋우면서 알뜰하게 펼칠 수 있습니다.

 

 

ㄴ. 운반

 

.. 애들 두 명이 나를 따라와서 구입한 물건을 식당까지 운반한다 ..  <오스카 루이스/박현수 옮김-산체스네 아이들 (상)>(청년사,1978) 48쪽

 

“애들 두 명(名)이”는 “애들 둘이”로 다듬습니다. ‘구입(購入)한’은 ‘사들인’이나 ‘산’으로 다듬고요.

 

 ┌ 운반(雲半)

 │  (1) 구름의 가운데

 │   - 남쪽 맨 뒤로 둥긋하게 운반에 고용(高聳)한 것은 곧 반야봉이요…

 │  (2) 음력 동짓달을 달리 이르는 말

 ├ 운반(運搬) : 물건 따위를 옮겨 나름

 │   - 이삿짐 운반 / 물건 운반의 편의를 생각해서

 │

 ├ 물건을 식당까지 운반한다

 │→ 물건을 밥집까지 나른다

 │→ 물건을 일터로 옮긴다

 └ …

 

국어사전에는 두 가지 ‘운반’이 나옵니다. 하나는 “구름 가운데”를 뜻한다는 ‘雲半’인데, 최남선이라는 사람이 쓴 글에서 보기글을 따 와서 싣고 있습니다.

 

 ┌ 운반에 고용(高聳)한 것은 곧 반야봉

 └→ 구름 가운데에 높이 솟은 곳은 곧 반야봉

 

문학작품에 쓰인 낱말이라면서 ‘雲半’을 실었구나 싶습니다. ‘高聳’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운반’이나 ‘고용’처럼 한글로만 적어 놓으면 무엇을 가리키거나 나타내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이지만 ‘우리 말’이라 하기 어렵고, ‘국어사전 올림말’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라고 하는 분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이와 같은 고리탑탑한 낱말을 국어사전에 왜 실어야 하는가를 따져야지 싶습니다. 굳이 싣고 싶다면, ‘한국 한자말 사전’을 따로 엮어서 실어야지요.

 

 ┌ 이삿짐 운반 → 이삿짐 나르기

 └ 운반의 편의를 생각해서 → 나르는 편의를 생각해서 / 나르기 좋도록

 

물건을 옮겨서 나른다는 ‘運搬’은 말 그대로 ‘옮기다-나르다-옮겨 나르다’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달리 더 할 말이 있을까요. 말뜻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고, 말느낌 그대로 적으면 됩니다.

 

써야 할 말이라면 한자말이나 미국말이라 해도 가리지 말고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쓸 만한 말이 아니면, 제아무리 토박이말로 지었다고 해도 안 쓰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다면 한자말 ‘운반’은 어떤 말일까요. 두루두루 쓸 만한지요, 앞으로도 뒷사람들한테 물려주면서 쓰도록 가르쳐야 할 만한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6.24 13:26ⓒ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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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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