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조선혁명군, 영릉가성의 승전보

김갑수 식민지 역사팩션(109회) 제2부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9.01 13:41수정 2008.09.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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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찢어버린 여인

나민혜는 조용히 물러나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시 영사관으로 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 남짓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사이 나민혜의 전화를 받은 일본 관헌이 들이닥쳤고 여자는 경찰에 붙잡혀 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박우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경찰이 출동했어요."
"그 여자가 무슨 일로 왔는데요?"
"한인 여권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어떡하면 좋지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요. 경찰서장과 통화를 해 놓았으니까."

그러나 박우진의 낙관은 빗나갔다. 정화는 이틀 간 조사를 받은 후 주소지인 경성으로 압송된 것이다. 정화는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와 함께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녀는 한국인 형사에게서 무서운 취조를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단동은 단순히 여권을 청탁하러 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에는 먹고 살기 위해 물건을 팔러 간 것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박우진 부영사는 남편의 친구라고 말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알지만 남편을 못 본 지가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도 상해와의 관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정화는 자신이 고문당한 기간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마 일주일이나 열흘쯤 되었을 성싶었다. 형사부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국인 김태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하지만 출입국 법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알고 보니 동농 선생 자부시더군요? 진작에 좀 말씀하시지요."

그는 자기가 여권을 내 줄 테니 앞으로는 마음 놓고 다니라고 말했다. 정화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김태식이 그녀에게 얇은 봉투를 내밀었다. 알량한 위로금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김태식이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정화의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아주머니, 우리의 성의니까 받으세요."

정화는 어깨를 뿌리치며 말했다.

"이거 나 준 돈인가요?"

김태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는 두 손으로 봉투를 눈앞에까지 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두 동강으로 찢어 날렸다.

치열해지는 국외무장투쟁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치달아 가는 동안 한국의 계몽주의 세력은 다소 위축되었다. 일부는 은둔이나 도피의 방법을 택했지만 나머지는 아예 노골적으로 친일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그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비호했다. 그래서 계몽주의의 유력 인사들은 여전히 한국 국민들의 지도자나 선각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이 감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반면에 국외 무장 투쟁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1920년대의 엘리트 의혈 투쟁보다는 대중과 함께하는 운동성 투쟁을 지향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무장세력은 연대하여 일본군과 격돌했다.

지청천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독립군과 남만주를 무대로 하는 조선혁명군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김원봉은 지청천과 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산하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김원봉은 장개석의 승인을 얻고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의 지원을 얻어 1932년 10월 조선혁명간부학교을 설립했다.

김문수는 여기에서 양성된 125명의 간부 가운데 하나였다. 남만주 영릉가성의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은 연대 병력으로 김문수가 속한 조선혁명군 대대병력 500명을 압박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경포와 중포의 포문을 다 열고 주력부대를 엄호하고 있었다. 지도자 양세봉 장군은 손수 기관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일본군은 언덕을 넘어 밀려왔다. 한국 독립군은 수의 열세를 무릅쓰고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김문수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총알을 아꼈다. 옆에서 다섯 발 정도가 발사될 때 그는 한 발 꼴로 방아쇠를 당겼다. 침착하게 조준하고 숨을 고른 다음에야 방아쇠를 당기는 그의 사격은 상당한 명중률을 나타냈다. 한국 독립군은 후퇴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산봉우리에서 적을 맞이으면 적은 태양을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중대장 김문수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병기를 놓친 병사는 수류탄을 소지하라."

바람결에 김문수의 철모가 벗겨져 나갔다. 철모는 풍진을 일으키며 산비탈로 뒹굴다가 적의 포탄 파편에 맞아 산산이 조각났다. 김문수는 옆에서 터지는 포탄 소리에 놀라 다급히 얼굴을 땅에 박았다. 고개를 든 그의 입과 코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니 반대편에서 적이 올라왔다. 그들은 또 태양을 마주보고 있었다. 따라서 적은 아군 쪽에서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사실 이것은 양세봉의 작전이 주효한 것이었다. 양세봉은 교묘하게 전선을 선회시켜 언제나 일본군이 해를 마주하고 싸우도록 만든 것이었다.

전원이 산악 훈련을 받을 대로 받은 독립군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볍고 부드러운 미투리를 신고 있었다. 그러니 산악에서의 이동이 중무장한 일본군보다 단연 민첩했다. 일본군은 둔하고 미끄러운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게다가 탄통과 탄약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산악 전투에서는 탄대 하나만 허리에 두르는 것이 현저히 능률적인 법인데 적은 미처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독립군의 최연소자 17세 소년 전현동

놀란 꿩들이 푸득 날아오르다가 총탄에 맞아 다홍빛으로 물들며 떨어져 갔다. 독립군의 군마도 피로 젖어 들고 있었다. 50세 최연장자 김재규가 적의 총알을 맞고 거꾸러졌다.

김문수는 표독스럽게 고함쳤다.

"땅에 붙어라. 밀착하라!"

17세 최연소 전현동이 김재규한테로 가 그의 몸을 뒤집었다. 염통에서 피가 콸콸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그의 군복 상의는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피를 본 소년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김문수의 정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소년은 김재규의 연발총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김문수는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멈춰라, 엎드려라."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전현동의 연발총은 적을 계속 쓰러뜨리기만 할 뿐, 그의 몸에는 총알이 날아들지 않았다.

"다섯, 여섯."
엎드려 있는 독립군들은 전현동의 총에 쓰러지는 일본군의 수를 세고 있었다.
"아홉, 열."
전현동은 신들린 듯이 쏘아대고 있었다.
"열다섯, 열여섯."

전현동은 정확히 19명의 일본군을 혼자서 사살했다. 김문수는 적의 화력이 잦아들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기민하게 몸을 날려 전현동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전현동의 군복 깃을 끌어 당겨 함께 나뒹굴었다.

"엄호하라, 엄호하라!"

조선독립군은 일제히 총구를 높여 엄호사격을 시작했다. 김문수는 전현동을 끌고 당기면서 언덕 위 참호로 돌아왔다. 전현동의 발목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교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독립군 전원은 점심과 저녁을 굶은 채였다. 그들은 산봉우리를 세 번이나 옮기며 적의 추격을 따돌렸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독립군은 언덕을 넘고 있었다. 굶주린 그들은 허리를 휘어 트린  채 걷고 있었다.

언덕 정상에 오르니 마을의 불빛이 나타났다. 순간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난데없이 수십 명의 아낙네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이 광주리에 덮여 있는 치맛자락을 걷자 김이 모락거리는 주먹밥이 모양을 보였다. 머리에 이고 온 것을 내려놓는 아낙네도 있었다. 배식은 언제나 부상자가 1순위였다. 김문수는 맨 나중에 주먹밥 한 덩이를 입에 넣었다. 그러나 주먹밥은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필자 김갑수는 최근 조선 성종 때 유학자 최부의 <표해록>을 바탕으로 한 전작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필자 김갑수는 최근 조선 성종 때 유학자 최부의 <표해록>을 바탕으로 한 전작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조선혁명군 #양세봉 #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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